"제 꾸밈없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아가페적 사랑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즐겨보던 유튜버가 논란이 터졌다.
자신의 영상을 보는 구독자의 질문에 막말했다는 이유다. 그가 만드는 콘텐츠들이나, 그 사람의 일상적인 모습들까지도 모두 호감이었는데 이런 일이 터지니 공허함이 먼저 느껴졌다. 늘 곁에 함께하던 사람의 빈자리를 느낄 때의 감정보다 조금 작긴 했지만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떤 방식이던, 가볍더라도 내 일상의 일부를 채워주던 것이었기에 그런 걸까.
어떤 사람이건 개인적인 일로 감정의 극한에 내몰리면 당연히 다른 일에도 영향이 간다. 당장 해야만 한다는 조급함 속에서도 머릿속에 박힌 다른 일이 신경이 쓰이고,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집중도 되지 않고, 속을 한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감정의 향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은연중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흘러나온다.
더 꼭꼭 숨기고 티 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감정을 완전히 해소해 내지 못하면 그것은 응어리로 마음속에 조금씩 쌓여서 정신과적인 병이나 흔히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불리는 온갖 질병들로 발현되기 마련이니까. 취미생활을 하건, 다른 이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풀건,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서 해소해야만 한다.
꼭 유명인,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여러 관계에 들어맞는 가면들을 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면의 답답함 때문에, 자신을 꾸미지 않더라도, [꾸밈없는 온전한 모습도 사람들이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아니, 받아들이는 걸 넘어서 그것도 좋아해 주길 바란다. 애초에 가면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길,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답답함을 감수하고도 쓰는 것인데 가면을 벗고도 꾸밀 때와 다름없는 감정을 가져주길 바라니. 쉽게 말해, 자신이 굳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마치 걸음마를 넘어 뛰어다니기 전의 어린아이가 가진 그것, 아가페처럼.
물론 가면을 벗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들을 털어내고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경우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공개함으로써 이를 털어내고, 혹은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성장하는 경우들이다. 사람들이 많은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씻지도 않고 츄리닝을 걸치고 나가는 타인을 무시하는 행위들과는 결이, 그리고 격이 다르다.
요즘 게임과 연예 관련 알고리즘들을 모두 '보고 싶지 않음' 설정했더니 이런 렉카 유튜버들의 논란 이야기와 뉴스 속 정치판의 개싸움 이야기들이 눈에 많이 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야기들은 다들 상대를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시쳇말로 전두엽을 거치지 않고 말과 행동을 해서 생기는 소음들이다.
우리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때는 제대로 된 사고 판단을 할 수 없는 영유아시기밖에 없다.
타인에게 행하는 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가끔 예외가 있다지만 일반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만큼 자기 자신도 그것들을 돌려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