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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n 15. 2024

미치지만

미치지만

 

사람의 마음이 미친 상태, 뇌가 병이 든 상태가 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솔로몬은 영감을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전도서 9장 2,3절입니다. 모두 같은 결말을 맞으니,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깨끗한 자나 더러운 자나, 희생을 바치는 자나 희생을 바치지 않는 자나 똑같다. 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고, 맹세하는 자나 맹세하기를 조심하는 자나 똑같다. 해 아래서 일어나는 괴로운 일이 이것이니, 모든 이의 결말이 같으므로 인간들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고 사는 동안 마음이 미쳐 있다가 죽고 만다는 것이다!


똑같은 정도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 처참하게 죽는 의인이 있고 부유하게 장수하다가 편하게 죽는 악인이 있는 것이죠. (욥 21:7)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죠. 이러한 부조리한 현상을 비롯하여 납득이 안되게 느껴지는 현상에 대해 신에게 아무리 답을 달라고 부르짖어도 답이 없는 것이죠. 


인간의 마음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에 병이 들게 되는데 뇌를 스캔해 보면 움푹 파이고 거무스름한 부분이 생긴다고 합니다. 신피질의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양쪽 모두에 다소간 심각한 상태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의식의 내면이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타인을 통제하려 들거나 통제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가들에게 상식화된 지식이죠. 


우뇌 쪽이 많이 고장 난 사람은 통제하려 드는데 극단적으로는 자신은 영웅적 기질이 있으며 타인의 통치가가 되어 다스리는 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신성한 사명이라는 듯이 여기는 것이죠. 일종의 기고만장인데 이론적으로도 확립되어 소위 왕권신수설이라는 것이 있으며 황제를 천자라고도 하죠. 


또한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통치해 달라고 받들어 모시죠. 군대를 모아서 전쟁을 하여 그런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역사적 큰 인물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꺼이 복종울 하여 순순히 군사로 모집되는 사람들이 있죠. 의식 수준이 가장 낮은, 절망적으로 낮은 사람들로 평가받는 사람들이죠. 좌뇌 쪽으로 많이 고장 난 사람들인데 그들뿐 아니라 종교의 추종자들이 더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쪽 극단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처해 있습니다. 제도화된 계층구조로 된 조직에서 가장 꼭대기나 말단에 있지 않으면 지시자와 지시이행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이죠. 


상관에게는 '옛서! 옛서!' 하면서 강아지처럼 순종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반대로 갑질을 하는 것이죠. 통제를 하면서 동시에 통제를 받는 입장이므로 양쪽 뇌가 동시에 고장이 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미친 혼란 상태를 올바로 극복하지 못하고 통제하거나 통제받는 입장을 취하는 것인데 가장 크게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악이 실현된 혼동, 무질서의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상태이죠. 물론 오늘날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대홍수전에는 사람들이 천살 가까이 살았고 땅이 저주 받은 상태라 힘들게 일을 해야 하는 상태였지만 오늘날보다는 자연상태가 좋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극심한 부조리한 상태를 정상적으로 극복한 사람으로는 에녹과 노아 정도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올바로 극복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동료인간을 통제하려 하거나 그 통제를 받으려고 함으로써 세상에 악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로 모두 죽었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욥인 경우에는 그러하지 않았죠. 그러나 미칠 지경인 그들의 마음을 토로하기는 하였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싶으니 재판을 열어달라고 호소할 정도였죠. (욥 13:18,19)


시편의 한 필자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보고 "어찌하여 내가 절망하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내 속이 뒤끓는가?"(시 42:11)라고 피력하였습니다. 


욥은 하느님의 의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욥 35:2)


그러나 위의 경우 모두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친 상태가 되어 악의 수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다려라. 나는 여전히 그분을 나의 위대한 구원자, 나의 하느님으로 찬양하리라."와 같이 하였습니다.(시 42:11, 욥기 1:21.22)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아닌 것입니다. 부조리한 현상에 대해 답이 없다고 단정하고 나름의 종교와 철학을 만들어 그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또 그것에 통제받으려고 하는 악과 거짓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창조를 무시하고 그분의 답인 성서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미쳐 악하게 되지 않고 법칙에 순종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선이 실현된 영적 낙원에 거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방주 가운데 보호를 받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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