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법칙전달자 Aug 18. 2024

성정과 존영

성정과 존영


한자어 특유의 함축적 의미는 그 단어를 분석적으로 풀이하면 뉘앙스가 달라져. 의미가 퇴색될 수 있습니다. 유의어로 바꾼다 해도 그렇죠. 


인간이란 존재의 일반적 성정이 아니라 특정 사람의 고유의 성정이라고 할 때 그 어떤 사람의 성정(性情)  즉 특성, 품성 혹은 성격과 정서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존영(尊榮)이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삶이 영속한다는 전제하에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이 찰나적으로 존재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존영은 본질상 무가치한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살다'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이 '묻다'에서 파생된 것처럼요. 즉 살아야 사람인 것이고 언제가 죽어 영원히 소멸될 존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후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꽃이 곧 질 것이기 때문에 피어 있는 동안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는 식의 주장은 부득이하겠지만 억지스러운 궤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살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억지스러운 변명인데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 선택에 대한 어떤 타당한 해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의적으로 고집스럽게 거짓과 악을 선택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구치하게 변명을 하거나 궤변을 늘어놓기보다 생명을 선택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의 해괴한 선택인데 절대다수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죠. 사실 절대다수라는 것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절대적 자유의지가 있고 그것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절대수나 그 비율은 자유의지 창조의 본질적인 가치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성정이라는 것을 형성해 갑니다. 섭리상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인간이 의도적으로 형성해 간다는 것은 아니죠. 그 정도의 의식 수준인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인생의 한 목적은 생명 즉 영생을 바탕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그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질 일이 없는 것이죠.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할 때 신분이나 배경, 직업 등을 묻기보다 성정을 묻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이것이 사람을 형성하는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존영이 생기는 것이죠. 창조주 앞에서도 아름다운 존영이 될 수 있죠. 


욕하는 세상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존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존영이 생기는 성정을 지닌 사람도 없고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체육, 학계, 종교계 등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통적인 것들은 너무 뻔하죠. 


현재 일시적으로 아무리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대부분은 죽어 있는 것이며 이미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어 몸이 완전히 해체된 사람도 창조주 앞에는 살아 있어 그 존영이 인정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단지 잠자는 상태일 뿐이며 곧 깨어나 원래의 잠시의 삶도 영생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지금의 삶이 영생의 일부가 아닌 모든 인간들은 사람으로서의 성정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존영도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에 관한 진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