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by 법칙전달자

경험적


관념법칙에 따라 사람은 경험을 통하지 않으면 지식을 얻는 것이나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합니다.


사람은 지식과 행복에 대해서 무한히 쌓아가고 누릴 수 있는 즉 담을 수 있는 그릇만 지닌 채 태어납니다. 기능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 잠재력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죠.


이러한 기능 자체가 없다면 아무리 경험을 많이 하게 해도 조금도 형성되는 것이 없습니다.


물이나 책상, 개미에게는 말하거나 노래하는 기능이 없습니다. 아무리 말하고 노래를 들려주어도 한마디도, 한곡도 하지 못하죠. 그런 교육이 전혀 실패하는 것입니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죠.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상식을 아무리 들려줘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대다수입니다.


인간들은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 전적으로 받은 것이라는 기본 개념이 의식 자체에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지 않고 의식자체가 병적으로 왜곡 형성되어 설령 배우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타고난 기능 자체가 고장 나 있거나 상실된 것인데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 사회로부터 배운 거짓의 세뇌로 인한 영향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교육을 받는 것은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하죠. 보고 듣고 연습해 보는 것이 모두 경험이죠.


행복은 경험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경험을 해보지 않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원한다거나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죠. '키기루루'라는 음식이 먹고 싶습니까? 혹은 그런 노래를 듣고 싶습니까? 혹은 그런 ...을 ...해보고 싶습니까?


인간이 먹거나 듣는 행동 자체가 경험인 것이죠.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그렇고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인간이 해보지 않은 것을 원하게 될 수 없고 추구하게 될 수 없는 것이죠. '쿠투티키'라는 행동을 해보고 싶다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먹고 보고 듣는 것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그것이 즐겁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자꾸 하려 하는 것이죠.


먹는 것 하나만 보더러도 그 종류, 인간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그 종류만도 매우 많죠. 과일, 음료, 차는 그중 일부이죠. 과일이나 차는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과일 중 사과 하나 만도 7,000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차 중 커피는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은 그야말로 무한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계속 개발하기까지 하는 것이니까요.


이 모두가 인간의 경험 영역 내에 있고 인간은 그런 것들 중에서 추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경험치 못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그 가치도 알지 못하여 형성된 편견에 따라 배척하거나 거부하게 되는 것이죠.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필요하기도 한 것입니다. 음식이 그러하죠. 즐거움을 주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것도 많죠. 약도 그중 하나입니다. 약을 먹고 고통이 줄어든 경험으로 계속 의존하여 먹게 되는 것이죠.


행복은 전혀 이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얻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여기서 말 이란 재미를 주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언어는 즐거움과 유익을 줄 수 있는 것들이죠.


어떤 것을 해보라고 할 때 말로만 해서는 상대에게 설득할 수 없겠지만 먼저 맛을 보여주고 그것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했다면 그다음부터는 그가 달라고 할 수 있죠. 어떤 필요한 것도 그렇습니다.


환자에게 약을 먹인 다음 효험이 있으면 그 약을 환자가 계속 먹게 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환자가 먹어본 적이 없는 약을 의사의 지시에 따라 먹게되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교육에 대한 경험 때문입니다. 의사 지시대로 해야 한다는 지식을 접한 경험이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인간에게 겸험은 절대적입니다. 그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유익을 얻거나 행복하기 위해 필수적이죠.

그러나 경험 자체를 해보려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입니다.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매우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죠. 그리고 누리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수십 년 우환과 스트레스와 각종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다가 죽게 되는 그런 불만스러운 삶을 살고 있죠. 꼭 필요한 것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 욕을 하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 불치병에 걸린 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34편:8절입니다.

성서 시편 필자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도 모릅니다. 관련된 지식에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맛보아 즉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죠.


인간은 쾌락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주로 몇몇 가지 자신이 경험한 감각적인 것을 원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할 수 있는 행동이나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을 알리는 언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죠. 외국어인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 할 때 이 면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면은 차지하고라도 당장 인간이 처해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 비유적으로 불치병인 암에 걸려 있는 상황에 대해 이 약을 한번 먹어보라는 제안에 대해 거부하여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이죠.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세속의사의 말이 매우 권위가 있으며 또 그들에게 크게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체도 환자이어서 곧 죽게 되는 존재이고 오진도 많으며 내심 돈벌이에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죠.


예수 당시에 예수는 의사로서 왔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영적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하였지만 그분은 문자적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사였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즉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완치시켰죠.


그분을 영적으로 체험하여 즉 맛보아 안 사람들은 나중에라도 그분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행복을 영원히 누릴 사람이 된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훌륭한 잔치에 초대하여도 그 초대 자체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절하여 그 유익하고 필수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21:1~10)


오늘날도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병의 치료를 경험해 보지도 못한 채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책입입니다.


다행히 아직 그 초대에 응할 기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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