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와 예언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주어진 단서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추리력인 것이죠.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도 이 추리력을 사용해서이죠.
인간에서 이처럼 추리할 수 있는 기능을 넣어주신 창조주야 말로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추리를 할 수 있습니다.
기계론이나 운명론, 예정론은 인간의 삶이나 역사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프로그램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순된 주장이죠.
그런 면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는 우주에서 가장 큰 신비이고 가장 큰 신성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큰 두 개의 세력 간에 서로 밀어붙이는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 양상이죠. 예언된 대로이죠.
창조주만이 인간의식의 원리와 작용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의식을 스스로 거부한 인간들의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장 잘 추리할 수 있죠. 성서에서 예언이란 그처럼 추리력이 사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의 단서가 되는 것은 크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어떤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태도나 습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식입니다.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단서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죠.
인간들 중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소위 미래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추리력이라는 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논리는 개념-추리-판단을 의미하죠.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들은 단지 지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 도덕적 개념도 필요합니다. 개념이란 부품이나 도구와 같죠. 그것들로 사상체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굴러가는 온전한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편하게 몸을 맡기고 드라이브를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정확히 알고 그 미래에 맞추어 살아서 결국 영속적으로 형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죠. 인간의 부실한 개념력과 미미하기 짝이 없는 추리력으로는 불가합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언제든 봉착할 수 있는 것이죠. 결코 자기 뜻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0:23입니다.
오 여호와여, 사람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걷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지극히 교만하고 주제넘고 게다가 고집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보다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의식화 되어 있죠. 신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직자들이나 신학자들도 그러하죠. 성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하면서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추리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에 따라 교리를 만들고 종파를 만들죠.
인간들이 그러할 것임은 여러 방식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인간들끼리도 그러합니다. 서로 생각들이 다르지만 자신의 생각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끼리 서로 싸워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추리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원하지 않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주제넘게도 창조주의 추리에 의한 예언을 거부하여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