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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배타성

by 법칙전달자

착한 배타성


‘네모난 원’처럼 모순된 표현일 수 있습니다. 만원이 된 경연장을 둘러본 어떤 사람이 “아무도 없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 지인이 없다는 뜻이죠.

특히 가족이나 친족이나 절친은 애타게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재앙이나 큰 사고가 생겼을 그중에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되는 지인이 무탈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으기 안심이 되죠. 누구를 바라며 산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죠. “남이야 어떻게 되든”입니다.

자신이 애정을 쏟는 대상에게 베푼 봉사나 친절에 그가 금전 등으로 답례를 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서운하죠, 일방적으로 주는 섬김에서 삶의 의미를 누리는 것인데 실망스럽기도 한 것이죠.

남이라고 느끼는 대상과 비교하면 극과 극입니다. 현재도 매일 전쟁에서 수 백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지인이 아닌 경우엔 ‘강 건너 불구경’이죠. 그러나 가족이라면 울고불고 난리이겠죠.


참척의 변을 겪는 경우 평생의 슬픔과 불행이 됩니다. 그 단면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배타성은 세계적인 범죄의 원인이 됩니다. 해적질을 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은 죽이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요.


배타적인 우리의식, 남의식은 범죄적인 것입니다. 범죄적인 마음상태입니다. 하나법칙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죠.


그러나 이웃을 가족으로 여기고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도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우 이례적인 것이어서 의심을 받는 것이죠.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것이죠. 오히려 주제넘음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타인이라고 잘못 간주되는 대상들은 모두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웃입니다. 실제로 적어도 가족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죠. 인간 본연의 관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이를 잘 나타내줍니다.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겨우 생명만 부지한 채 쓰러져 있었죠. 그러나 동족인 레위인도 제사장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지인은 아니고 거기서 도와준다고 어물쩡거렸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적대관계에 있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쉬게 해 준 다음 그 비용도 대줍니다. 그들 돌보는데 추가로 비용이 드는 경우에도 지불하겠다고 여관주인에게 약속하죠. (누가복음 10:25-37)


남 혹은 낯선 사람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 마땅히 나타내야 할 태도를 알려주죠. 사실 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남의식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의식상태가 아닙니다.

배타성 있게 지인에게 베푸는 정성도 그러합니다. 어떤 연쇄살인강도의 내연녀에게 한 기자가 그녀의 남자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녀의 대답은 “나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해요. 나에게만 잘해주면 되죠.”였습니다.


경악스럽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적 차원에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죠, 타국가가 파괴되건 그 국민이 죽건 상관없는 것이죠. 아니,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파괴하고 많이 죽었다는 것을 좋은 소식으로 여기죠.


자신의 혈육이나 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베푸는 친절이나 정성은 오히려 부담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가 남의식 즉 배타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야 마음 놓고 관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상 그런 악한 배타성을 가진 99% 이상의 인류는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배타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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