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지금도 지인들끼리 경치 좋은 곳에서 파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죠. 먹고 마시고 음악도 듣고 자연을 감상하고 교제도 하면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할 때는 “살고 볼일이야!” 하는 것이죠. 물론 건강하고 사람사이에 갈등이 없을 때 그 즐거움은 더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생에 대한 애착, 행복한 삶에 대한 애착은 본능적입니다. 삶에 대한 요구는 당연하죠.
그런데 세상은 그런 행복한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은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 일시적으로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99% 이상의 사람들이죠.
성서에는 문자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도 죽어있다고 하는 경우와 죽어 있는 사람도 살아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매일 죽는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잠을 보장받지 못하는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죠. 죄인이라고 해도 죽이지 않는 동안에는 잠은 재웁니다.
죽음과 같은, 시체와 같은 무시무시한 상태가 되는 것인데 심지어 꿀잠이라고 하기까지 하죠.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그는 생생하게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문자적으로는 생생하게 깨어서 돈을 벌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람도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죽어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이나 요소를 지니지 않았다면 그의 일시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은 자연이 차별 없이 베푸는 혜택으로 쾌락을 누리며 마음껏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사형수나 마찬가지이며 사법적으로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에베소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계속 나를 따르십시오.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장사 지내게 하십시오.”(마태 8:22)
‘나는 너의 행위를 알고 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다.(계시 3:1)
문자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그들이 모두 살아 있습니다.” (누가 20:37,38)
죽어서 수 천 년이 지나있더라도 단지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현재 살아 있어도 영원한 죽음, 둘째 사망이 확정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죽음이 그런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7:59.60입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을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여,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호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는 이 말을 하고 죽어 잠들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그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패패를 두려워해야 하는데......
계시 2:22입니다.
이기는 사람은 결코 둘째 사망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인간이 이 악한 세상에서의 거짓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것이죠. 철학적, 정치적, 종교적 거짓에 지배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예수나 그의 제자들처럼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둘째 사망 즉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이미 둘째 사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점을 알아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