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섬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뒷 문장에서 진리가 의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 수사법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는 성령이나 말씀, 지혜 같은 것들도 꼭 인격체인 것처럼 묘사된 곳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하느님으로 간주하죠.
물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들은 인간이 그런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알려줍니다.
고대의 한 표현은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성령, 사랑, 진리와 같은 것들을 대할 때 단지 추상적인 개념 정도로만 인식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그러한 것들을 어떤 의미에서 섬겨야 할 대상이거나 자신을 섬길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동료인간에 대해 왕이면서도 종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많은 표현들은 그렇게 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18)
실제로 수호천사나 어떤 유능한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다면 그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
참지혜가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광장에서 계속 목소리를 높인다.(잠 1:20)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잠 1:29)
지식을 미워하는 것과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대구로 사용하죠. 같은 의미를 강조를 위해 반복한 것이죠.
내 말을 잘 듣는 자는 안전하게 살고 재앙을 무서워하는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낼 것이다.(잠언 1:33)
사고나 사기나 폭력 등의 범죄를 당하는 것뿐 아니라 질병과 노쇠 자체가 재앙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안전하고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게 살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가 우리를 그런 식으로 섬긴다면 우리 역시 지극 정성으로 그를 섬기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떤 인간정부나 통치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나 사랑 같은 것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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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마치 인격체인 것처럼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죠.
깊은 묵상을 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처럼 옆에 둘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