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길
형언이 안 되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는 그저 외경스러울 뿐입니다. 그 규모가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반영된, ‘신성’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막막한 그 운영원리, 그 작용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인데 그러한 인간과 그 의식의 작용 자체가 가장 큰 신비일 수 있습니다.
위의 단락의 내용은 제 의식의 표현이죠. 그러므로 심지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 뿐이며 모든 현상은 자신의 정신의 소산일 뿐이라는 유아독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논리적으로는 부정하는 것이 불가하다고도 합니다.
저도 외부의 다른 누군가가 이 글을 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쓰는 것인데 그 마저도 저의 상상일 뿐이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공허한(?)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신비롭고 신성한 것을 만든 창조주의 그에 관한 말씀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입니다.
“오 하느님, 나를 살피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조사하셔서 내 근심을 알아주십시오. 내 속에 해로운 길이 있는지 보셔서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시 139:23, 24)
인간은 자신의 의식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내성 통찰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잠언 20:27입니다.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
인간에게 마치 창조주의 등불처럼 자신의 깊은 내면을 훤히 살피는, 구절에서 ‘영’이라고 표현된 기능이 있습니다.
물론 창조주께서 넣어 주신 것이고 다윗은 이를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시편의 위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우주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에는 모든 인간의 마음 상태가 정확하게 관찰되는 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해로운 길이 있으며 창조주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인간은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멸되어 그 행로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행로에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죠. (예레미야 21:8. 마태 7:13,14)
인간이 전적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결코 생명의 길로 걸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1:8입니다.
오 여호와여, 사람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걷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피조물이므로 그 누구도 원하는 길로 온전히 갈 수 없습니다. 창조의 지침에 따라 길을 걸어야죠. 그에 따라 마음의 길을 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