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적

by 법칙전달자

무신적


지금 세상은 압도적인 무신적 풍조 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문서들은 매우 친근하게 신의 세계를 기록하고 있죠.


그러나 그 기록마저도 인간이 꾸며낸 것이라고 하죠. 미신으로 가득 찬 신화라고도 합니다.


절대자가 존재하더라도 인간 개개인에 무관심하거나 인간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니 그런 존재라면 무시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범신론이나 이신론 같은 것도 그에 속하죠.


무신론은 유물론이나 진화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고 그것도 맹목적 우연에 의해 생겼다는 것이죠. 또 그렇게 해야 일관성이 있죠.

서로 간에 온전한 조화와 일관성이 있으려면 무신론이나 유물론, 진화론도 물질적인 것이며 우연히 맹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해야 하죠.


‘론’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밥이나 자동차 집 같은 것은 볼 수 있죠. ‘밥론’, ‘자동차론’ ‘집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관찰되느냐 여부보다 논리적이냐 여부가 더 근본적입니다. 논리적이면 관찰되지 않아도 진리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론’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그가 한때는 여자의 뱃속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논리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죠. 그에 대한 사진이 없어도 “그러하다는 것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야.” 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논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 목격으로 확인하려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죠.


카메라가 없는 시절 누군가가 카메라의 설계도룰 가지고 와서 그대로 만들 수 있게 투자하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데 설계도를 보아서 잘 모르겠으면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 보아 기대했던 결과를 산출하면 맞는 것이죠. ‘카메라론’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론’이란 거짓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거를 볼 수 없으므로 과거에 이랬다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이 철학이죠. 또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그의 의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욥조차 창조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특성에 대해서죠. 그분의 의의 절대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 바가 있습니다.


급기야는 창조주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뜻을 흐리게 하고 지식 없이 말하는 이자는 누구냐? 사람이 감히 전능자를 흠잡고 그와 다투려고 하느냐?(욥 38:2)


남자답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가 묻는 말에 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말해 보아라. 새벽별들이 함께 기뻐 외치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갈채를 보내며 소리를 질렀을 때에 말이다.(욥 38:4,7)


천사마저 환호성을 울린 우주의 창조를 본 적이 없죠. 욥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이요.


하느님을 책망하고 싶어 하는 자는 대답해 보아라.”(욥 40:2)


세상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죠. 사랑의 완전한 창조주가 있다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인간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신의 부재 증명의 근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무신적으로 생활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종교인들은 위선적일 뿐입니다. 실생활은 무신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욥도 자신은 이해도 감당도 안 되는 부조리한 현상들을 겪고 창조주의 특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유가 있죠.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단지 파상적인 현상만을 보고 창조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창조를 비롯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며 더구나 영계를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니 ‘...론’ 즉 거짓이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나 철학이 생긴 것이죠.


물론 어떤 이유에서 일시적으로 생긴 그 부정적인 현상들은 곧 없어집니다. 하느님이 없어 보인 것 같은 현상도요.


계시 21:3,4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함께 계시는 상황은 아니어서 오해를 받고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상황은 곧 종료됩니다.


욥도 일시적으로 오해를 했지만 결국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42:1~6입니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대답했다. “이제 저는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주께서 뜻하시면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지식도 없으면서 내 뜻을 흐리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하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알지 못하는 너무나 놀라운 일들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부디 들어라. 내가 말하리라. 내가 질문할 터이니 답해 보아라’ 하셨습니다. 제가 주에 대해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 눈으로 주를 분명히 봅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말을 거두어들이고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세상에 충만한 부정적인 현상들이 왜 일시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해 그렇게 허용한 당사자에게 설명을 들은 후에 판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설명도 듣지 않은 것을 함부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의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무신적으로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14:1~3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여호와는 없다” 하고 말한다. 그들은 타락한 행동을 하고 가증한 행위를 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들을 내려다보신다, 통찰력 있는 자가 있는지, 여호와를 찾는 자가 있는지 보시려고. 모두 다 빗나가고 하나같이 타락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그 종말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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