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과 어떻게 싸우는가?
싸움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미움은요? 사랑은 그 자체가 선한 것입니까? 악은 그 자체가 악한 것입니까?
개념은 정의하기에 따라 그 자체로는 선악 간에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아가페)은 그 자체의 개념에는 선악의 성격이 들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칙에 근거한다’는 핵심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세상이나 돈이나 어둠이나 쾌락을 사랑할 수 있죠. “어둠은 추악을 가려줄 수 있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어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음이나 증오도 악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야죠.(이사야 61:8; 시 45:7; 97:10; 로마 12:9.)
미움 자체가 나뿐 것은 아니고 나쁜 미움이 나쁜 것이죠.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미움은 본래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싸움은 어떨까요? 성서의 용법에 의하면 싸움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해야 되듯이 뭔가에 대해 싸우도록 애초에 속성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라는 것 자체는요.
군대라는 것은 싸움을 위한 조직인데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예레미야 2:19) 여호와에게도 만군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죠.
싸움이 어떤 싸움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죠. 사랑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반드시 미워해야 하는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이래의 구절들은 동료신자에게 싸우라고 권고하고 있고 자신도 싸워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이 예언들에 의해서 훌륭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딤전 1:18,19)
믿음을 위해 훌륭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대는 그 생명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공개적 선언을 했습니다.(딤전 6:12)
나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끝까지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시기를 고대해 온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7,8)
또한 무엇과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싸우는 것인지도 명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력한 힘 안에서 계속 능력을 얻으십시오. 마귀의 교활한 행위에 맞서 굳게 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갑주를 입으십시오. 우리는 혈과 육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들과 권위들과 이 어둠의 세상 통치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갑주를 입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악한 날이 닥칠 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것을 갖춘 뒤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에베소 6:10~13)
우리가 비록 육체로 걷기는 하지만 육적으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헛된 추리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거슬러 일어난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고후 10:3~6)
싸우는 상대에는 정부와 세상의 통치자들이 있고 하늘의 악한 영들이 있죠. “헛된 추리와 진리를 거스려 세워진 높은 것”이란 추상적인 것도 있죠.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국가주의 같은 독성이데올로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이나 외부의 군주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의미하죠.
물론 모두가 무력으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나 그것들의 악한 명령이나 영향력에 굴복되지 않음을 의미하죠.
또한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도 해야 합니다.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쳐서 종처럼 부립니다.(고전 9:27)
물론 여기서 몸이란 신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모든 악한 성향을 의미하죠.
싸움이라는 것 자체는 하지 않을 상황이 되면 좋은 것이죠. 또 싸울 필요라는 것이 없는 것이 본래의 상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자유의 법칙에 따른 피치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유 자유의지라는 것 때문이죠.
자유이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든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른 감정도 생기죠. 그런데 창조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퇴치해야 하죠. 즉 그것과 싸워서 몰아내야 합니다. 통제, 제어를 하거나 싸워서 물리쳐야 하죠.
그릇된 욕망 자체는 본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릇된 생각을 제지하지 않고 발전시키면 그에 따른 욕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와는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보고 먹어야겠다는 욕망을 발전시켜 결국 그에 굴복하였죠.
가인도 동생을 죽인다는 생각에 제동을 걸지 않고 발전시켜 행동에 옮겼습니다.
한 천사도 인간의 숭배를 자신이 받고 싶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그런 욕망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실행하여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 천사들은 인간 여자들과 성관계를 갖는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발전시킨 욕망대로 행동하게 되었죠.
인간에게 짐승이나 동성과의 성관계는 본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유전자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생각을 상상력을 사용하여 발전시키지 말아야 하는 데 그것과의 싸움을 포기하여 항복하고 동조한다면 수간이나 동성애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자들에게 싸움은 본래적이고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사단의 유혹적인 접근과 제안에 대해 단호하게 물리쳤죠.
사도 바울도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기는 사람은 그와 같이 흰옷을 입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인정할 것이다.(계시 3:5)
내가 이기고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은 것처럼, 나는 이기는 사람을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게 할 것이다.(계시 3:21)
반드시 이겨야만 창조주의 승인을 얻어 살 수 있습니다.
예수도 곧 대대적진 전쟁을 하게 되죠.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시 6:2)
또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하고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서 흰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고 있었다. 그분의 입에서는 날카롭고 긴 칼이 나오는데, 그분은 그 칼로 나라들을 치시고 쇠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전능자이신 하느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으실 것이다.(계시 19:14,15)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모두 죽인다는 것이죠.
이 싸움은 문자 그대로의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은 찬양하면서 구경만 하는 싸움입니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전혀 예외 없이 죽게 됩니다.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듯이요.
인간은 싸우지 않을 수 없음을 명심하고 승리하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