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대함
인간에게 모든 조건이나 기능이 전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이 권유 혹은 유도하는 바에 따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하여 마치 자신이 창조주가 된 것 같은 입장에서 주제넘은 판단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는 창조주의 수 십 가지 특성을 알려줍니다. 그분이 인간이 이해해 주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기술되어 있죠. 나름의 초월적인 판단을 하려 하는 것은 주제넘음이며 결과는 해롭습니다.
창조주의 특성 중 하나는 관대함입니다. 나누어 주시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죠. 만물의 제1원인은 논리적으로 시작이 없습니다. 제1 원인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서 나오지 않았고 시작이 이었다면 그 시점에서 완전무에서 갑자기 생겼다는 것인데 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시작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존재하게 된 것이 예수이죠. 그 이전까지는 유일한 존재였죠. 그렇다고 그분이 외로움을 느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관대함 때문에 생명을 나누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수억의 천사들에도 그렇게 하였죠. 모두 영생의 전망이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의 경과 후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창조하고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값은 매우 비싸서 예수의 생명의 값과 동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죽이고 죽은 것이 인간생명이고 파리 목숨 같다고 하기도 하지만 원래 그 고귀함은 언어로 묘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숭고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창조주의 관대함으로 인한 것이지요.
그 관대함은 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한 생명을 누리시지만 유일하게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십니다.
그분이 생명을 나누어 주실 때 불멸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은 조금이라도 관대함의 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이나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도 그러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종들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면서 자유를 독차지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종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자신들의 정당한 욕구를 모두 충족할 수 있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금지 명령은 단 한 가지뿐이었는데,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2:17) 그들은 창조주의 뜻을 행하면서 엄청난 자유를 누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첫 조상에게 왜 그토록 많은 자유를 주셨습니까? 그들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그들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창조주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올바로 살아갈 것으로 당연히 기대하셨습니다. (창세 1:27; 로마 2:15)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께서 주신 자유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탄이 제시하는 부당한 자유를 선택하여 도덕적 표준을 스스로 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를 더 많이 누리기는커녕 자신들과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을 죄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비극적인 일들이 뒤따랐습니다.—로마 5:12.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관대함으로 부여받게 된 생명과 자유에 대해 합당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피조물이 필연적으로, 속성적으로 갖게 되어 있는 한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창조주의 입장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99% 이상의 절대다수가 그 관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속아서 그렇게 되어 있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지만 생명의 길이란 창조주에 대한 충절을 고수하는 길입니다.
“충절 가운데 걷는 자들에게는 방패가 되시어 ··· 자신의 충성스러운 자들의 길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잠언 2:7, 8)
그렇습니다. 충절의 길을 가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