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해력
이해되지 않은 지식, 문구를 줄줄 외우고 유창하게 말하는 것은 열매를 산출하거나 생산적인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혜인데 원리가 이해되지 않은 지식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혹은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먹은 것이 잘 소화되어야 합니다. 이해란 이와 같은 소화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음식을 꿀꺽 삼키는 것은 먹는 즐거움과 소화 모두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단지 많은 지식에 대한 욕망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도무지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자랑이나 공명심의 동기로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할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이해와 지혜와는 오히려 멀어집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경쟁심이라는 것을 갖게 되죠. 훨훨 날 수 있는데 머리띠를 불끈 졸라매고 경쟁의 대열에서 애를 써서 뛰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비교하게 되죠. 물론 나름의 시각과 관점과 기준으로요.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자기들을 재고 자기들끼리 서로 비교하니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고후 10 :12)
그런 식으로 티격태격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는 것은 이해력이 없어서입니다. 보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과정이 즐거운 섭취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해 즉 소화를 못 시키니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상대경쟁이란 것에서 입학이나 합격 등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런 식으로 해오던 공부를 중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큰 고생을 한 것처럼요. 고생 끝에 낙을 얻었다는 식으로요. 근본부터 잘 못되었는데 현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죠.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요.
서로 비교하고 평가해야 하는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죠.
세상이 지금처럼 엉망이 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개인의 명성, 지위, 권위 등과는 상관없이 이해력이 없습니다.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애초에 그런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써 뛰는 삶이 아니라 훨훨 나는 삶을 살고 있죠.
하늘에서 그런 땅의 곧 있을 멸망을 훤히 보고 있는데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