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抽象)
만 2세경부터 추상적으로 추리하고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추상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사고한다는 것과 의미가 비슷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첫마디는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은 행복하다.”입니다.
‘영적’, ‘필요’, ‘의식’, ‘행복’이 모두 추상어지요. 각 단어의 뒤에 붙은 ‘를’, ‘하는’, ‘은’, ‘하다’와 같은 조사와 어미들은 한국어의 특수성에 의한 것입니다. 그 자체도 추상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추상어로만 이루어져 있죠.
물건의 기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모양’, ‘크기’, ‘색’과 같은 단어들도 모두 추상어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것은 ‘모양’이야 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의 의식 가운데만 있는 개념이죠.
‘존재’, ‘위치’, ‘방향’ 같은 기본 어휘들도 추상어입니다. ‘성질’이나 ‘관계’ 같은 것들도 대표적인 추상어입니다.
무엇을 가리키며 “봐! 저것이 관계라는 것이야.” 하며 이이를 가르치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유물론적이고 물질 추구적인 세상에서 이런 지식이 사람들에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 추상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추상적인 사물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질 즉 인성이 올바르거나 뭔가와의 합당한 관계도 현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존재 자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냉장고나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방의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 사용법도 알고 있지만 무엇과의 관계나 어떤 성질이 자신의 의식 세계의 어느 위치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얼마나, 어떤 크기로,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것들을 물질적인 소유물처럼 구체적으로 의식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이 없는 것이죠.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할 것을 전혀 배우지 않은 결과입니다.
철학적 사유라는 것은 본질상 전혀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에서 출발한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추리, 개념적 사고라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들에게 후자를 대치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그런 불치병에 결려 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추상의 빛과 행복이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