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된 동물
인간은 잡식동물로 분류되긴 해도 이나 장의 구조가 초식에 가깝죠. 송곳니도 찢는 용도가 아니라 깨는 용도라고 하죠.
노아의 홍수 후에 창조주는 동물을 너희에게 식물처럼 먹을 수 있게 준다고 선언하였죠. 단 반드시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빼고 먹으라고 하였고 정결한 동울로 분류된 것에 한해서 먹을 수 있었죠.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다고 해서 꼭 위생상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죠. 그들에게 정결의식을 갖게 하기 위한 목적일 수 있죠. 선악과에 무슨 독성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상징으로 사용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홍수이전에는 인간이 초식만 하고 살았느냐 하면 그것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육식을 했더라도 묵인되었을 수 있고 공식적으로 선언된 것이 홍수 후라고 생각할 수 있죠.
이슬람인과 유대인들은 돼지가 성서에 부정한 동물로 언급되어 있어 오늘날도 먹지 않는데 그런데 예수 당시에도 돼지를 키우는 유대인들이 있었죠. 로마인에게 주문을 받아서 키우는 것인지 돼지고기를 먹는 유대인들이 있어서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돼지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어도 먹었을 수 있었던 것처럼 홍수이전에도 초식만 했다고 단언할 수 없죠. 아벨은 양을 키웠는데 그 당시 목축을 한 것이 단지 털이나 가죽 혹은 젖만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닐 수 있죠.
홍수 후에 갑자기 육식동물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육식 동물은 원래부터 있었고 그렇다면 사냥도 일상적으로 있었죠. 초식 동물들에게 달려들어 발톱이나 이로 죽이고 그 몸에 이를 박고 고기를 뜯어먹었을 텐데 그게 잔인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창조주와 조화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단순한 생각에 의한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순한 생각으로 꾸며낸 상상에 따른 것이죠. 성서에서는 그런 무시무시한 것, 괴기스러운 것들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라 묘사하죠.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다양성 중 일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는 욥에게 그런 괴물 중에서 둘을 선택해 그 두렵게 하는 특징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고 바다괴물이나 리워야단 같은 동물들도 언급되는데 공룡을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죠.
과학자들은 공룡이 약 6,400만 년 전에 멸종되었다고 하고 그 후에는 없었다고 하는데 발견되는 많은 자료들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특히 용이라는 것은 공룡을 의하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12지 중의 하나가 용인데 일관성이 있으려면 그것이 다른 열하나의 동물들과 같이 인간이 목격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죠. 창조주는 우리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에서 공룡을 멸종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 시점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공룡가운데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육식동물들도 있는데 아마도 때가 되면 그러한 것들을 재생시켜 실제로 쥐라기 공원 같은 것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동물들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는 묘사가 성서에 두 번 나오는데 이성뿐 아니라 고등 감정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식동물들이 육식동물의 공격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이를 피하려 하죠 때 이른 죽음을 피하려 하긴 하지만 막상 죽을 때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사자가 들소 같은 동물을 사냥하고서는 보통 목덜미 같은 것을 물어 숨을 끊어 놓고 먹는데 간혹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뜯어먹기도 하는데 들소의 표정이 어그러지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죠. 아마 통각 자체도 인간의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죠. 동물들은 자기의 새끼를 본능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지만 죽으면 먹이로 여기는 경우가 많죠. 인간과는 근본적인 다름이 있을 수 있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게 하고 피를 흘리면서 뜯어먹는 이 육식에 대해 감정이입을 사용하여 부정적으로 느끼는 이유 중에는 애완동물의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인간 아기도 애완견처럼 그렇게 살갑게 넋을 잃게 할 정도로 귀여움을 떨지는 못하죠. 인간에게 대한 것 이상으로 그렇게 애틋한 정을 깊게 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죠.
아무튼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공격하여 비명을 지르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면서 뜯어먹는 것에 대해 언짢게 느끼는 것은 정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일치하게 이사야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소와 곰이 함께 놀며 사자가 풀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예언이 나오죠. 동물들 사이에 평화가 있게 될 것이라고도 하죠.
물론 일차적으로는 사납고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그런 특성을 지닌 사람은 없게 된다는 상징적인 면으로 적용된다고 하죠. 그러나 어느 정도는 문자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실제 육식동물도 초식에 적응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개과와 고양잇과가 가장 대표적인 육식동물의 두 부류인데 또한 인간과 가장 친하게 된 것이 그들이죠. 사자나 호랑이도 얼마든지 인간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데 인간이 키우다가 밀림에 방사한 사자를 찾아 몇 년 만에 만나면 그렇게 그 사람을 얼싸안고 반가움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죠. 또한 동물원에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는 사례는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육식으로 되어 있는 육식동물의 생리적 체질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변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동물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시체는 항상 생기죠. 육식조류나 파충류, 포유류 등이 이를 처리하겠죠. 그리고 주변의 강이나 호수 등에 풍성한 물고기들을 먹으면 될 것입니다. 어류이하의 하등 동물은 통각세포가 없죠. 물속의 육식은 지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의 먹이가 되도록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고 그렇게 잔인한 광경도 아니지요. 재미있는 광경으로 관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곤충들의 세계 역시 그에 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육상 척추동물의 세계와는 또 다른 양상이겠죠.
인간도 계속 물고기를 식물처럼 섭취하게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식품과 관련된 미래의 양상은 정확하게 예단할 수는 없죠. 식물로도 다양한 육류의 맛을 낼 수 있다고 하죠. 이제 신계계가 되면 인간과 동물 사이 그리고 동물과 동물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야생에서 발생되고 있는 어떤 모습들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수 있죠.
인간은 어떤 동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무는 독충이나 해충도 없을 것입니다 숲에서 동물에게 공격당하거나 벌레에게 물릴 염려가 전혀 없이 잠도 잘 수 있을 것이며. 만나게 되는 모든 동물들이 애완동물처럼 그렇게 될 수 있을 텐데 성서의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