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각의 무한성과 한계

by 법칙전달자

인간의 생각의 무한성과 한계


전도서의 마지막 구절들입니다.

8 회중을 모으는 자가 말한다. “지극히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9 회중을 모으는 자는 지혜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을 백성에게 계속 가르쳤으며, 깊이 생각하고 철저히 살펴서 많은 잠언을 수집했다.

10 회중을 모으는 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고 진리의 정확한 말씀을 기록하려고 애썼다.

11 지혜로운 자들의 말은 소몰이 막대기 같고 그들이 수집한 말은 단단히 박힌 못 같으니, 한 목자에게서 주어진 것이다.

12 내 아들아, 이 외에도 조심할 일이 있다. 책을 많이 쓰는 것은 끝이 없고, 너무 책에 빠지면 몸이 지친다.

13 모든 것을 들려주었으니, 결론은 이러하다. 참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14 참하느님께서는 모든 행위와 모든 감추어진 것이 선한지 악한지 판결하실 것이다.


영감 받은 성서의 말씀이기에 인간의 개성이나 신념 그리고 창조주로부터의 영감성 모두가 온전히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서 창조주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헛되다는 것은 허가 되다. 무가 되다. 없어진다는 의미이죠. 죽어 없어지면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참으로 쓸모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로 시작되죠.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그러한 부정적 개념이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인간의 삶이 헛되지 않으려면 참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죠. 그분의 계명은 도덕표준 즉 선악과 관련되어 있죠. 인간의 최종적인 생사는 선악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에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이죠. 게다가 죽은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음은 7절의 하반절의 "영도 그것을 주신 참하느님께로 돌아간다."에서 알려주죠. 영 즉 인간의 개성과 기억 그리고 미래의 생명에 대한 전망이 소멸되지 않음을 의미하죠. 부활을 알려 주죠. 그러나 부활되어도 위에 언급된 원칙의 적용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에 대한 임의적인 가치관에 따라 창조의 법을 무시하고 살면 그야말로 영원한 허무가 되죠.


이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에게 참고가 되는 사항입니다. 12절의 내용이죠. 책을 많이 쓰는 것 즉 글을 쓰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죠. 머릿속에 계속 새로운 소재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제 어떤 소재가 떠오를지 어떤 발상이 떠오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떠오르면 표현본능에 따라 쓰고 싶죠. 그렇게 쓰인 책이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더 이상 볼 내용도 쓸 내용도 없다고 하는 순간이나 경지가 있을까요? 인간의 정신에는 무한성과 영원성이 있어 그렇지 않죠. 상상력과 창의력, 독창성과 발상력은 인간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 이상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직 묻혀 있는 것과 미래에 발현될 것들을 예단할 수 없죠. 창조주가 끝이 없다고 했으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을 만드신 분의 선언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조심하라고 한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전도서에서는 인간이 지혜를 찾아 구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여러 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도 지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 만족할 만한 성과 즉 진리를 발견하는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고 인간에게는 지식 혹은 진리에 대한 집요한 본성적인 추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노력에 대해 그렇게 큰 질책은 하지 않고 조심할 일이라고 하는 정도이지죠. 온 영혼을 그 일에, 공부하고 집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죠.


더구나 참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본분을 무시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해로울 수 있죠. 인간이 무슨 활동을 해도 가치 있으려면 선에 대한 창조주의 표준을 알고 그것에 순종하는 상태에서이죠. 그것을 무시한 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써도 헛될 뿐이라는 원칙을 명심하고 의식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무한성이 있지만 명백한 한계 내에서 그러한 것이죠. 그 한계를 인식하고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글쓰기는 영원한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헛되지 않은 것일 될 수 있습니다. 이 전도서의 글처럼요. 물론 성서 자체도 성서 자체에서 다른 책으로 바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문자적으로 영원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필요와 목적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지만 영원이라는 표현을 수사적으로 쓰는 것이라면 그러하다는 것이죠.


백 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사랑하는 동료인간을 위해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럼 전도서의 이 원칙을 적용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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