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과 죽음
총알이 머리나 심장을 관통하여 바로 쓰러져 즉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러움을 받을 만한 행복한 죽음일 수도 있죠.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은 밤의 어느 시점에 비실비실하더니 침대에 몸을 쓰러트리고 무의식상태에 빠져들죠. 일단 존재가 없어지는 것처럼 됩니다. 그렇지만 시체가 되는 것 즉 몸이 급부패를 일으키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죠.
자다 깨면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무의식 기간이 얼마였든지 상관없이 자아가 연속되죠. 그런데 이 자아의 연속은 신체의 연속과는 상관은 없습니다.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잠과 죽음의 큰 차이 중의 하나는 죄의 소멸여부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원칙 때문이죠. 달콤한 잠은 일종의 복이 되기도 하지만요. 세속법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의 대가는 사형 즉 죽이는 것이죠. 그는 죽음으로써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죠. 물론 그것도 부족하다고 하여 부관참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죠.
잠은 그렇지 않지만 죽음은 일종의 종말 혹은 멸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 지구의 멸망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죠. 개인에게는요.
그러나 지금까지의 죽음은 개개인에게 진정한 멸망, 영구적 멸망은 아닙니다. 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삶이 다시 주어지죠. 그가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어 몸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도 몸은 자아의 연속성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몸은 그가 먹은 음식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체부위가 잘리고 주요 장기가 인공물이나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이식되었다 해도 그것은 자아의 연속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시간의 경과도 그러합니다. 무의식 중에는 시간의 경과도 의식하지 못하죠. 냉동인간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죠.
성서에 나오는 부활의 사례들은 모두 신제가 보존된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게 된 경우지만 인간의 자아의 본질적 요소인 기억이나 개성이 저장되는 것이라면 거기에 물질을 입혀 원래의 존재로 재생되게 하는 것은 창조주에게는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도 호박 속의 모기의 피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추출하여 배양하여 공룡을 재생시킨다는 상상을 하죠.
그리고 생물의 신체를 이루는 세포는 끊임없이 복제를 하죠. 원래의 것과 똑같은 것이 계속 생기는 것이죠. 예수도 빵을 계속 복제시켜 작은 양으로 수천 명을 먹인 것이죠.
물질적인 것의 복제나 재생은 지금도 자연계의 일상적 현상인 것이죠. 무신적 과학자들도 여러 가지로 정보들이 어디엔가 저장된다고 합니다.
곧 부활은 일상사가 되죠.
그러나 죽은 모든 사람들과 앞으로 죽을 사람들이 모두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영원한 멸망 혹은 둘째 사망에 처해진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죠. 성서에 묘사된 불못 혹은 게헨나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죠. 인간의 사망이 그러한 멸망이냐 하는 것은 창조주가 결정하죠.
특히 조만간 있을 아마겟돈에서 죽을 수십억의 사람들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이 됩니다. 하지만 과거에 죽었던 사람들은 악인이라 할지라도 부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고 그런 죽음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창조주의 관점에서는 살아 있는 것이죠. (마태 22:32)
악인들도 천년통치 기간 중에 부활되지만 과거의 죄를 문책받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데 부활 후의 그의 변화된 정도에 따른 심판을 의미하죠. (요한 5:29)
부활은 죽기 직전의 신체가 훼손되거나 심히 노화된 상태 그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먼저 부활된 자녀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그렇게 되겠죠.
공상과학처럼 들리나요? 인간도 그 이상의 공상을 하고 그것을 글로 쓰고 영화로 만들죠.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과거의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을 그러한 기적적인 문명을 누리고 있죠. 그리고 생물계를 포함하여 자연자체가 기적입니다. 작은 씨가 심겨서 주렁주렁 열매를 맺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성서에 묘사된 부활과 관련된 이러한 일들은 곧 당연하게 지상에서 펼쳐지게 되죠. 살아서 그것을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