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력
보통 이성이라고 할 때는 일상에서는 이성과 오성을 통용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오성으로 번역했던 용어를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인지 요즘은 주로 지성으로 번역합니다. 칸트는 이성과 오성 즉 지성을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오성’이나 ‘지성’이 적합한 번역은 아니지만 해당하는 용어가 없으니 부득이하게 그렇게 사용하는 것으로 봅니다. 쉽게는 학문할 수 있는 정신적 기능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과목을 공부하는데는 오성을 사용하죠. 이 영역의 성격은 일방적으로 밝혀진 지식을 전달하고 이해하고 학습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유일성과 일치하게 답이 하나인 영역이고 분열이 있을 수 없는 영역이죠. 물론 진리로 확립되기까지는 어떤 가설적인 주장에 따라 학파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주장이 진리로 입증되면 없어지는 것이죠.
세상은 a수학지역 b수학지역과 같은 분열이 있을 수 없지요. 바로 인간의 오성 혹은 지성의 영역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사실 그것은 애초에 인간이 그 답을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적인 추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사유이죠. 이 글에서는 오성적 사고, 이성적 사유 즉 사고와 사유라는 다른 어휘를 사용하여 그 차이를 구별하고자 합니다. 칸트는 인간의 사유로는 철학이나 종교적 성격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법칙으로 증명했죠. 임어당은 인간은 사유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직도 사유하고 있다면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인 것이죠.
오늘날 실존주의는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본질(철학적 종교적)은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려졌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하죠. 그래서 현재의 삶을 얼마나 쾌락적으로 혹은 보람있게 사느냐에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실존주의이죠.
물론 종교가 있고 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이미 중세나 고대에 사람들이 종교와 갖고 있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톨스토이에 의해 선언된 바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해 종교를 심리적이나 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용하는 차원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90% 이상의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나 국법 혹은 민간의 전통에 따라 사실상 무신적 유물론적으로 삶을 산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유를 통해 진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창조주로부터 전달되는 진리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연구와 묵상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죠. 바로 이성의 올바른 용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문하는 기능인 오성 혹은 지성이 사용되는 영역에는 논리학, 심리학, 언어학 등의 인문학이 포함되어 있죠.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것은 지성의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로 사용되는 이성과 지성을 합하여 이지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아닌, 창조주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과 합당한 관계를 갖는데 필요한 기능을 ‘이지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인 영원한 행복이 그렇게 하는 개인에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