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보다
태풍이나 홍수,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 혹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지역에 가기는 꺼려질 것입니다. 자연재해는 많으면 수십만의 사상자를 발생시키죠, 그래도 진정이 되었다면 가 볼 수는 있죠.
그런데 지구상에는 그런 이유로 들어가기 꺼려지는 지역보다 테러의 두려움 때문에 가지 못하는 지역이 훨씬 많죠. 한국 사람들은 10만 평방킬로미터 되는 남한 지역은 그래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여권 등을 검사받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테러에 대한 큰 두려움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보면 두려움으로 결코 자유롭게 갈 수 없는 지역이 더 많죠. 아프리카 같은 곳도 상당지역이 납치나 테러의 가능성이 높아 마음 놓고 여행 다닐 수 없죠. 요즘 같아선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혹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여행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보다 테러로 죽은 사람들이 월등히 많죠. 인간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 2억에 이른다고 하죠.
이게 현 세상입니다. 말이 안 되죠. 그런데 그런 세상상태보다 그걸 당연히 여기는 인간들의 의식이 더 심각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라들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는 그런 의식말이죠.
행정구역은 나라는 아니지요. 그러므로 여행 다니는데 불편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들어가면서 통행세를 낸다든지 도민증을 보여주는 일은 없죠. 그리고 한국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어. 굶어 죽지는 않을 수 있죠. 치안도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크게 테러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웬만한 데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죠.
그런데 한국의 경상도 만한 지역이라도 이스라엘 지역은 통치권이 나누어져 있죠. 가자 지역 같은 데는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고 있죠. 이스라엘 정부도 그렇고 각 정부들은 문제가 많아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해도 그래도 하나의 정부가 나은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에 한반도에도 두 개의 정부가 있어 서로 싸우다가 한반도 전역에서 3년간 사망자만 250만 정도 되는 재앙을 겪었죠. 어떤 자연재해보다 큰 피해였죠.
나라들의 존재 자체가 무엇보다도 재앙덩어리입니다. 한 나라에서도 현 정부를 재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죠.
이론적으로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하죠.
한때 런던 성 바오로 대성당의 성공회 주임 사제였던 윌리엄 랠프 잉은 1922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좋은 정부는 언제나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인데, 어떤 나라도 그런 정부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말에서 부분적인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정부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하였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가라 할지라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 세운 정부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영국의 극작가 필립 매신저의 이러한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정말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사실상, 사건과 상황을 통제해서 수많은 동료 인간들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지식과 지혜를 갖춘 정치가도 전혀 없다. 그리고 설령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미국의 수필가 브룩스 애트킨슨은 그러한 문제를 인정하여, 일찍이 1951년에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다스릴 초인이 필요하다. 그 일은 매우 광대한 것이고 현명한 판단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초인이 없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초인은 없다.
인간의 통치가 도무지 효과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악한 인간 정부들은 철저히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됩니다.—다니엘 2:34,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