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력을 얻으려면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발적, 맹목적, 비연속적이라고도 하고 무모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통찰의 결과입니다. 애초에 의식을 가진 존재가 창조의식이 없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도록 설계되었는데 인간이 창조의 근원에게 왜 그렇게 설계하였는지 원망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이 올바로 작동되도록 하는 간명한 지침 그것도 하나의 지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침에 순응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자유도 주었죠. 지금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이 99%라 할지라도 이는 창조의 불안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택의 자유의 절대성을 의미하죠.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이 악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비난받을 것이 우려되어 창조주가 사람의 뇌를 조정하여 선을 선택하는 사람의 비율을 높이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악을 선택하는 사람의 비율은 창조의 안정성이나 완전성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확정성원리로 온전하게 창조되었죠. 인간의 의식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조금도 프로그램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인간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로버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의식의 본질을 이해 못 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절대성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전자파가 그 밝혀진 성질에 따라 절대적으로 안정성 있게 작동된다는 무의식적 차원의 절대적 확신에 의해 전자기기를 만드는 것이죠. 그에 적용된 확신과 같은 확신을 자유의지의 절대성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양자요동이라는 극한 불안정성이 배경으로 관측됨에도 그러하죠. 인간의 의식에 대해 신이 구체적으로 프로그램해놓은 것은 전혀 없다는 점은 사르트르에 의해서도 논리적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법칙에 자동적으로 순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율적으로 순응하도록 되어 있죠. 순응하는 결과는 행복이고 불응하는 결과는 불행이 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인과원리는 절대적으로 철저히 적용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려면 눈 즉 시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통찰력 혹은 영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통찰력은 간단히 정의하면 “보이는(감각되는) 현상을 낳는 보이지 않는(감각되지 않는) 원인을 보는(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뉴턴이 물리적 통찰력으로 물건이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의 보이지 않는 원인인 중력을 발견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통찰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만 언급하면 창조주에게 기도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정도로 친근해지려면 창조주의 특성을 알아야 하죠. 그래야만 창조의식을 갖게 되죠.
그런 과정 없이 인간은 절대적으로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없는데 그렇게 인간의 의식이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의식을 열고 진지하게 창조주로부터의 메시지를 연구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 진리가 없다는 면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 희망 없이 짧은 삶을 미치는 그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그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