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없다 모르다

by 법칙전달자

없다 모르다


없는 것은 보이지도 않기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일컫는 단어가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있다의 부정형으로 표현하죠. (there is [are] no [not], 没有) 두 단어 이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모르다'도 '지식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그런지 '알다'의 부정형으로 표현하는 데 (do not know, 不知道) 한국어에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있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품사로 분류할 때 동사나 형용사로 분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존재사'라는 별도의 품사는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도 하나의 존재, 즉 있는 것인데 존재론이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봐도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예사롭지 않을 것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소피스트들도 관련한 궤변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죠. 나는 화살을 보면 어떤 순간에도 정지해 있죠. 그리고 사물이란 있는 것을 없앨 수 없고 없는 것을 생기게 할 수 없죠. 인간은 전자 하나도 없앨 수 없으며 만들어 낼 수도 없어서 우주의 전체질량은 일정하다고 하는데 근래는 그것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고 하므로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변화 혹은 전환은 일상적이죠. 전등이나 태양에서 끊임없이 광자 알갱이를 쏟아내어 인간이 계속 사물을 볼 수 있긴 한데 그런 광자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광자란 광파라 할 수 있고 파동은 또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광파 혹은 광에너지는 다른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죠. 식물은 이를 이용해 광합성을 통해 생장에너지로 전환하죠. 태양광에너지는 열에너지나 전기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고, 헤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은 전기에너지를 빛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죠. 결국은 그런 것들은 역학적 에너지로 바뀔 수 있습니다. 광자는 정지질량이 0이라고 하므로 에너지도 그에 상응하는 것일 텐데 구체적인 것은 좀......


아무튼 아무리 전환되어도 있는 것을 없게 한다는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본질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질량에너지의 총체적인 것은 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물이 움직인다는 것은 착각이나 환상일 뿐이라고 하는 궤변도 있죠. 그런데 움직인다는 것은 위치의 변화이죠. 존재를 움직일 수 즉 변화시킬 수 없다는 면에서 일리 있을 수 있지만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라는 말도 있죠.


원래 이 글은 이런 성격의 즉 언어적이거나 사변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은 그것이 에너지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죠. 누군가 필요해서 취하면 다른 곳에서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을 한 대가로 받은 월급으로 통장장고가 늘어나면 사장의 계좌는 그만큼 비게 되는 것이죠. 음식도 같은 양을 여러 사람이 먹으면 개인당 할당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죠.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사람의 음식을 준비하려면 양이 줄거나 질이 떨어지는 것이죠.


물질적인 존재들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물질은 다른 데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죠. 뺏기라도 해야 하므로 해적선이 있는 것이고 전쟁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물질계의 섭리를 몰라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 수가 얼마나 되든지 우주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물질들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게 지니고 있죠. 이걸 알면 인간은 필요한 것의 부족을 염려할 필요는 없게 됩니다. 문제는 무지나 욕심이나 탐욕, 야심 같은 것이죠.


그러니 필요한 물질적인 것도 조금도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풍부하게 누릴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이나 가난, 결핍, 궁핍 등은 결코 인간이나 만물, 우주의 본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나 불순종, 악함으로 인한 것이죠. 전적으로 그러합니다.


전체 물질이 한계가 있어도 본질상으로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물질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리적으로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필요한 물질을 구하기 위해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드디어 본론에 이르고자 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영적인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이죠.

그런데 이 영적인 사물은 물질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식과 같은 영적인 자산은 타인에게 아무리 나누어줘도 줄어들지 않죠. 강의의 청강자가 아무리 많아도 개인에게 돌아가는 지식의 양이 줄어들거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조금도 아니지요. 자신이 어떤 음악을 감상한다고 할 때 누군가가 그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죠.


보거나 들어서 뇌 속의 지식이 증가하게 되면 물질적으로는 뉴런의 가지치기가 증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양자차원에서의 그 본질은 아직 모릅니다. 물질의 궁극의 본질 안에 어떤 비물질적인 성격의 것이 있는지도요. 그래도 현재 밝혀진 바로는 가지가 또 다른 가지를 치고 하는 그 한계가 밝혀져 있지 않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의 한계를 알 수 없죠. 무한하다고 할 수 있죠. 각자가 무한히 공유해도 그것은 조금도 줄지 않죠. 인간에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수가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떤 영적인 것이라 하더러도 성격상 육적인 것이면 그것은 한계가 있어 서로 자기가 가지려고 싸우게 되죠. 권력 같은 것이 그러합니다. 한 사람, 하나의 조직이나 기관에 집중되어 있고 공유할 수 없는 것이죠. 서로 자신이 가지려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죠. 예전에는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권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이라고 하기에도 적합지 않죠.


하늘 왕국의 이 땅에 대한 통치권은 144,001명이 공유하고 있죠. 그러나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더 가치가 높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죠.


예수는 침례자 요한 이후에 하늘왕국은 그런 면에서 인간에게 침투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 11:12) 어쨌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수치는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통치라는 것은 철저히 계획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것은 그 성격상 그런 것이며 또 일시적인 것(1,000년)이지만 일반적인 영적 자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데 없는 것은 있게 해야 하며 모르는 것은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누구에게 민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침범을 해서라도 탈취해야 하는 것이고 귀찮게 문을 두드려서라도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강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전재산을 팔아서라도 취해야 하는 것이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얻습니다. 그러나 가서 줘도 거절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죠.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없어지게 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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