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4
비밀번호
(라운드 4)
"하루종일 청소만 했어요?"
그는 왠지 그녀에게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프고 지친 몸으로 집구석구석을 반들반들하게 만들어 놓은 그녀의 마음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녀에게 이러쿵저러쿵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직접 그에게 먼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나간 추억거리를 던지듯 이야기해 주길 바랐다. 그땐 그랬지 하면서.
"아뇨, 풍경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도 하고..... 뭐, 꿀잠도 자고요."
"그럼,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안 나갔어요?"
"뭐, 그런 셈이죠.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편한 대로 해요. 난 그냥 심심할까 봐...... 저쪽 방에 노트북 있을 텐데. 완전 고물이지만, 아직 꽤 쓸만해요."
"진작에 말해줬어야죠. 어쨌든 잘 됐네요. 내일은 덕분에 덜 심심할 것 같아요."
"음, 비밀번호는 181818."
"방금 저한테 욕한 거예요?"
"아니, 비밀번호요. 어때요, 절대 안 까먹겠죠?"
"그래도, 무슨 비밀번호가 씹팔이에요? 크크크."
"제가 화가 많아서 그래요. 가끔 잘 잊어먹기도 하고."
"알았어요. 뭐, 절대 못 잊을 거 같긴 하네요. 흐흣."
그녀는 그의 비밀번호를 되뇌면서 왠지 모를 유쾌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이래서 찰지게 욕을 하게 되는 건가. 뭔가 심하게 비틀린 채 박혀있던 나사 하나가 뿅 하고 빠지는 기분이랄까. 남이 듣든 말든 혼자서 이렇게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욕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이만큼 간단명료하면서도 임팩트 있고 유머스러운 욕은 별로 없을 것이다. 18.
그가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녀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18, 그녀에게 왠지 모를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매직넘버 같았다. 비록 교회는 안 나가지만, 그녀는 누군가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왔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더욱 왠지 모를 오해와 핍박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기보다는 18이라는 욕이 담긴 언어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시켜 값싸게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자 금세 부끄러워졌다.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그녀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고작 18이라는 숫자에 이렇게 홀라당 마음을 뺏기다니.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이런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그녀가 알고 하나님도 알고 계실 테니.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마저 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자의식의 과잉 때문에 숨 쉬기가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마침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도 이제 막 주방정리가 다 끝난 참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죠, 정말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괜찮아요, 저는 티비 좀 보다 잘게요. 잘 자요."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루 종일 텅 빈 집에 혼자 있느라, 말을 할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그렇다고 당분간 얹혀사는 주제에 밤늦게까지 말상대까지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몇 주 정도는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왠지 외로웠다. 부모님도 계셨고, 친구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과 함께 있는데도 몹시 외로울 때가 있었다. 그런 날들이 일 년이 되고, 이 년이 되고, 십 년이 되고, 그녀의 나이가 되었다. 그건 그녀의 고질병이 되었고 어쩌면 외로움은 그녀가 마주해야 할 단 하나 남은 진실한 친구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리모컨을 찾아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오래된 먼지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브랜드 없는 리모컨. 그렇지만 전원을 켰다 껐다 하거나 채널을 이동하고 볼륨을 조절하는 기능에는 아무 이상 없는 그런 리모컨이었다. 거실 벽 쪽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텔레비전도 그랬다. 그녀는 볼륨을 18에 맞추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딱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동물농장, 주인이 있던 개 한 마리가 먹을 것이 좀 생기자 동네의 다른 개들이 그걸 빼앗아 먹겠다고 달려들어 여기저기 심하게 물고 뜯어서 주인이 많이 속상해하는 내용이 방송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개가 아니지만, 그 개의 처지나 감정이 사뭇 이해되고 공감되었다. 18. 겨우 진정된 그녀의 마음이 울퉁불퉁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리모컨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갑자기 거실은 깜깜해지고 너무나 조용해졌다.
자발적 강제취침모드.
바로 자야겠다 마음먹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려니, 그날 링 위에서 미친 듯이 쥐어 터지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왜 바보같이 그냥 맞고만 있었을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따져보고, 안되면 욕하고, 그래도 안되면 같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었다면 덜 억울할 텐데. 무슨 공자, 부처, 예수 났다고 그대로 온몸으로 다 받아냈던 것일까. 하아, 181818.
"캬톡!"
바로 그때, 이 늦은 밤에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너에게서 어둠의 포스가 느껴진다. 조심해.'
마치 그 애는 '나는 지금 네가 이불속에 누워서 한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에게 톡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어둠의 포스라니. 무슨 스타워즈라도 찍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동안 연락도 없던 놈이 갑자기 뜬금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런데, 마침 그날의 억울함을 떠올리며 분노하고 이불킥을 하던 그녀였기에 이것을 예사로 넘기기도 어려웠다.
'텔레파시가 통했냐, 어떻게 알았어?'
그녀는 나름 재치 있게 답문을 보냈다. 몇 분 후, 그 애가 다시 답문을 보내왔다.
'응, 그렇다고 하지. 아무튼 조심해, 이만.'
아니,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거지. 그렇다고 하자는 건 도대체 뭘까. 그리고 아까부터 뭘 자꾸 조심하라는 걸까.
'뭐야,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애는 그녀의 톡을 읽지도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혼자 탐정놀이를 하다가 밤을 새우고 말았다. 말이 놀이지, 그건 탈출구 없는 미로 속을 혼자 헤매는 죽음과도 같은 짓이었다.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바둑의 수가 10의 171 제곱이나 되듯이 그녀가 가진 삶의 경우의 수도 간단하지 않을지 모른다. 복잡하고 미묘할수록 단순하고 뚜렷한 기준점을 만들어 풀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 그녀는 친구가 톡으로 던져준 메시지에 집중해 본다. 포. 스.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이나 인상. 그렇다면 그 친구는 그녀의 그런 사정을 어떻게 알고 그 시간에 먼 데서 그녀에게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일까?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예리했다. 어쩌면 그녀의 우스갯 답문에도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관적으로 그녀에게 떠올랐던 키워드, 텔. 레. 파. 시. 한 사람의 사고, 말, 행동 따위가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심령현상. 이상하게도 이러면 말이 된다. 그녀에게 텔레파시 능력이 있어서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이 그 친구에게 전달됐다면? 그래서 친구가 그녀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면? 사실 상식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까지 실제로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AI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그런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일이 하필 그녀에게 일어나리라고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고, 이상하게도 그러면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느꼈던 지독한 외로움의 원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이유 모를 미움, 그리고 친구에게 받은 의문의 메시지.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좀 특수한 상황이라는 설정이 되면 해소되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려고 애썼다. 내가 망상에 빠진 걸까? 내가 드디어 미친 걸까? 아니다. 그녀는 그 어느 때 보다 정신이 맑았고 침착했고 논리적이다. 만약 그녀에게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감추고 살아야 하는 걸까, 드러내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 만약 그녀의 텔레파시가 불특정 다수에게 필터링 없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거라면, 그녀의 사생활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그 밖에 그녀에게 다가올 수많은 물음들에 어떻게 답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까? 그녀는 문득 그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 몹시 두려워졌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을 이제는 전혀 다른 각도로 직면해야 한다. 낯선 환경에서 불편한 옷을 입고 정확한 목적지조차 모른 채 계속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그녀 자신을 발견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녀는 나지막이 하나님을 불러본다. 이 문제는 그녀의 친아버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링 위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었던 아버지, 그런 용감한 아버지도 이제는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 오로지 그녀에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줄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분은 그녀가 바라는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그녀를 인도하실지도 모른다. 마치 방향키 없이 홍수 속을 떠다니던 노아의 방주처럼 그녀의 삶도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녀의 목숨이 이렇게 붙어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녀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녀는 그녀의 의지를 가지고 그녀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그녀에 관한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믿고 의지할 곳은 여전히 하나님뿐이었다.
그가 안방에서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사이, 그녀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그녀의 하나님을 불렀다.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가나요 하면서.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 드는 생각. 걱정하지 말고 그저 믿음대로 살아가면 된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처럼 말씀 안에 살다 보면, 출구 없는 미로처럼 죽음 같던 너의 삶도 살아진다. 그러니 그저 평안하라고.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