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5
첫 외출
(라운드 5)
"띠리띠리 띠리리리리~"
오전 7시, 아침부터 청소차가 후진할 때 자주 나오던 멜로디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엘리제를 위하여' 벨소리가 세 번 반복되었을까. 송장인 듯 엎드러져있던 그가 나무늘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얇은 이불속에서 손가락이 삐죽 나오더니, 핸드폰을 향해 더듬거렸고 마침내 벨소리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다시 방 안은 정적이 흘렀다. 그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지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이불을 획 걷어차고 바닥에 앉는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기에, 그렇게 얼마가 또 지체된다. 요즘 회사에서 일이 많은 데다 집에 온 손님을 나름 챙기느라 꽤 피곤했던 모양이다.
이윽고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손님은 혼자 밤새 무얼 했는지 커다란 창을 등지고 잠에 푹 빠져있다. 그녀의 등 뒤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하얀 머그잔에 조금 따라서 마시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십 분 정도 변기에 앉아 있다가 양치질을 하기 시작한다. 평소 빠른 속도로 힘을 주어 닦다 보니 칫솔모는 금세 사방으로 퍼지고 닳는다. 손바닥으로 비누거품을 내서 일단 턱에 바르고 일회용 면도날로 쓱쓱 밀어댄다. 세면대에 찬물을 틀어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난 후,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온다. 머리카락을 말리고 스킨을 바르고 옷을 골라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시각은 오전 8시. 어서 서둘러야 아홉 시까지 출근도장을 찍을 수 있다.
그가 나가버린 아파트엔 깃털처럼 새하얀 고요만이 차르르 내리고 있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송사리 떼처럼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흔들어대고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문득 길고 긴 잠에서 깼을 때,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화장실과 거실 여기저기에 물자국과 젖은 수건 같은 집주인의 흔적들이 그녀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까꿍, 밤새 잘 잤냐고. 그녀는 거실창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얼굴을 묻었다. 두 눈을 살짝 감고 따뜻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도록 잠시 내어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과 베개를 주섬주섬 갰다. 그가 두고 간 싱크대에 놓인 물컵으로 생수를 마시고 터벅터벅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 바닥에 놓인 젖은 수건과 옷을 주워서 빨래 바구니에 넣고, 그녀는 늘 그렇듯 변기에 가만히 앉아서 볼 일을 본다. 쪼르르르 오줌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같이 느껴진다. 누구든지 이 작은 변기 앞에서 다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마다의 다양한 소리를 내면서.
그녀는 아침 겸 점심식사로 계란프라이를 먹기로 한다. 김치 빼고 냉장고에 있는 유일한 재료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참치는 저녁에 김치찌개 끓일 때 넣을 생각이다. 계속 라면만 끓여 먹을 수는 없잖은가. 두부나 콩나물이 있다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텐데. 일단 그녀는 프라이팬에 콩기름을 살짝 두르고 가스레인지를 켠다. 달걀을 톡 깨서 중불로 달군 프라이팬에 넣으니 지글지글 흰자와 노른자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쟁반 위에 김치랑 계란프라이랑 쌀밥이 놓이자, 그녀는 짧은 감사기도를 하고 젓가락을 든다. 그리고 아침식사는 금방 끝난다. 뭔가 좀 아쉽고 허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이렇게 텅 빈 아파트에서 비밀번호 181818을 누르고 그의 컴퓨터를 가지고 놀 것인가.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기웃기웃 대는 것도 이젠 슬슬 지긋지긋하다. 그녀만 빼고 모두 다들 행복해 보여서 괜히 외롭고 슬퍼진다. 분명 저마다의 속사정이 있을 텐데, 아무도 그런 말은 거기에 올리지 않는다. 그저 남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을, 보기 좋은 일들만 잘 편집해서 올리는 것 같다. 뭐, 좋았던 기억들을 저장해 놓고 지인들과 공유하며 즐기고 싶다는데,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기도 하고, 한 마디 남기기도 하고 그런 거니까. 그녀는 단지 자신이 최근에 겪은 일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마냥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허비할 만큼 그녀는 나약하지는 않다. 단지 회복할 얼마의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툭툭 털고 일어날 만큼 별일 아닌 일은 아니었으니까.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지금의 그녀처럼 아프고 슬펐을 테니까.
그녀는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보기로 용기를 내본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두 번, 그리고 세 번은 괜찮아질 것이다. 그리고 언제까지 그의 집에서 이렇게 마냥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우선, 그의 집 주변을 산책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몇 번 왔다 갔다 한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그의 집 주변을 돌아본 적은 없었다. 정말 별일 아닌 일인데도, 집 밖을 나서는 일조차 그녀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검은색 텀블러에 생수를 절반 정도 채웠다.
그가 빌려준 옷을 대충 걸치고 현관을 나서기 전, 문득 전신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얼굴과 몸 여기저기 멍과 상처가 아물지 않아 눈에 띄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자신의 경험상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의 일상에 관심이 별로 없다. 아니, 그녀는 그랬다. 스토커나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보통의 일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고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그녀는 괜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마치 어떤 정신병동처럼, 아니 마치 하나의 거대한 소굴 같이 느껴졌다. 설사 그녀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그런 소굴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어쨌든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고 어려운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정말 별것 아니다. 그저 그녀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오던 생각이나 행동들, 그런 삶의 소소한 부분들을 끊임없이 유지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투명한 유리컵처럼 모든 생각과 일상이 노출되는 그녀의 상황으로는 그조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삶을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을 끝내버릴 수도 없다. 그러기엔 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들도 너무 많다. 사실 현실적으로 그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나가기가 쉽지 않다.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아는 건, 모두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때, 그녀 곁에 함께 있어준 사람이라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나 단지 그 하나가 그녀에게는 다른 어떤 사실보다 중요하고 소중했다.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그의 집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기에, 그녀는 뭐라도 해보기로 한다. 이 집을 나서는 그녀의 첫 외출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현관문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그 잠시 동안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할 것만 같은 공간 속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엘리베이터는 멈췄고 문은 열렸고 그녀는 또 다른 공간을 향해 나아간다. 모든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행하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고, 내가 움직이면 모든 것이 움직일 것이다. '
적어도 그녀의 세상 속에서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니까. 비록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뤄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아무것도 바라고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드디어 가을의 문턱, 세상의 중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대면한다. 여름의 설레는 따뜻한 바람은 아니었다. 이제는 서늘해진 차분한 가을의 바람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그런 바람이 지나갔다. 도무지 잡을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바람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곧이어 다가올 겨울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의 냄새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 어떠랴. 그녀는 사나운 그 무엇도 충분히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맞을 만큼 맞았고, 아플 만큼 아팠고,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런 인고의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인고의 시간들도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파트를 조금 벗어나 조성된 작은 공원에 들어섰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로 된 벤치에 앉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계속 걸었다. 회색 보도블록을 따라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길가에 심어진 꽃과 나무들을 살펴보며 걷기로 했다. 소나무, 단풍나무, 치자나무, 장미, 수국 등이 보였다. 누군가 이 공원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관리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다못해 여기저기 놓여있는 돌덩이들과 들풀도 누군가의 작품인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또 한 바퀴를 다 돌았고, 마지막 한 바퀴는 정말 천천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어떤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 앞에 보조기구를 두고 그것에 의지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어떤 남자가 뛰면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공원 한편에 있는 놀이터에는 귀여운 꼬마들이 보였다.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정글짐도 기어올랐다. 그녀는 아까 처음에 보았던 벤치에 도착했고, 거기에 잠깐 앉았다. 완벽한 그림 속에서 왠지 그녀 홀로 어울리지 않게 도드라져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챙겨 나온 텀블러의 뚜껑을 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르고 맑았다.
그녀는 공원에서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스르륵 긴장이 풀린 듯, 그녀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예 대자로 뻗어 누웠다. 나름 마음은 정리했지만, 그녀의 몸은 아직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보다 신체가 더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정신은 앞장서서 그녀를 끌고 나아가려 했지만, 그녀의 신체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기다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정신과 신체의 간극 속에서 그녀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마치 전륜구동 시스템의 자동차가 눈밭에 빠져 계속해서 공회전을 하다가 연료를 다 소진해 버린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그녀의 의지와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렇게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그녀는 잠에서 깼다. 열심히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도무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꿈속에서 조차 너무도 진지했고 치열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웬만해서는 잘 때 땀을 흘리지 않는 그녀인데, 지금 그녀의 옷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녀의 무의식 저 너머엔 어떤 세계가 잠들어 있을까. 그녀는 욕실로 가서 젖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그녀는 숨 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도 샤워기를 끄지 않고 물줄기 아래 그대로 서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그렇게 물줄기를 맞으며 거친 숨을 쉬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언제쯤 그녀는 정말 괜찮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