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6
낙수
(라운드 6)
"똑똑똑."
그가 아무리 욕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는데, 샤워기에서 하염없이 물 떨어지는 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벌써 두 시간째, 그녀와 그는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이러고 있다. 그는 그녀가 며칠 전 당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모르겠다.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도.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바로 그것밖에 없는 거라면? 그는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쿵쿵쿵, 연희 씨! 거기 있는 거 맞아요? 대답 좀 해봐요!"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욕실 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안에서는 샤워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계속 들릴 뿐이었다. 그는 가방을 뒤져서 까만 모나미 볼펜을 꺼냈다. 이것으로 욕실 문을 열어볼 생각이다. 먼저 볼펜의 플라스틱 몸통을 볼펜심과 분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좁고 가느다란 구멍 속으로 볼펜심을 집어넣었더니, 욕실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연희 씨? 연희 씨!"
하얀 수증기가 가득 찬 욕조 안에 그녀가 무기력하게 앉아있었다. 샤워기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아이, 정말. 괜찮아요?"
그는 샤워기를 끄고 커다란 수건을 꺼내서 그녀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지도, 눈물을 글썽거리지도 않았다. 왠지 어떤 호러영화의 주인공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 지훈 씨..... 왔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러고 있어요?"
"그냥...... "
"그냥 이라뇨?"
"그냥, 이러고 있고 싶었어요."
"아니, 무슨......."
"미안해요...... "
"아니,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건 아니에요.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그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배고파요?"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선 거실로 가서 밥솥을 열어보며 말했다.
"그냥 시켜서 먹을까요? 혹시 뭐 먹고 싶은 게 있어요?"
"짬뽕이요. "
"그래요, 중국집에 전화할 동안 머리 좀 말리고 있어요. 옷도 좀 갈아입고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네."
그가 냉장고에 다닥다닥 붙은 음식쿠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거기서 중국집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창 밖에는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오고 나면 무더웠던 여름의 기운이 가시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겠지. 그는 신호음이 울리자, 스피커를 켜고 핸드폰을 안방 침대 위에 휙 던졌다. 그리고 옷장에서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들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네, 만추반점입니다."
"아, 예. 여기는 장말동 은마아파트 102동 406호인데요, 짜장면 하나랑 짬뽕 하나 부탁 드릴게요."
"짜장 하나, 짬뽕 하나. 맞지요?"
"아, 콜라 1.25리터짜리 부탁드려요. 결제는 카드로 할게요."
"네네, 알겠습니다. 비가 와서 혹시 좀 늦을 수도 있으니 이해 부탁 드립니다."
그는 핸드폰을 끄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지는 못했었다. 혹시 어디 상처 난 데는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그녀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아니, 그냥......."
"뭐 묻었어요?"
"그냥 정말 괜찮은가 본 거예요."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싸며, 그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긴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직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안방에서 헤어드라이어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밝아졌다.
"와아, 드라이어도 있었어요?"
"미안해요. 진즉 챙겨줄걸. 깜박했네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그녀는 헤어드라이어를 받아서 콘센트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드를 꼽고 부지런히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말리기 시작했다. 살짝 열어둔 창문틈으로 들리는 빗소리와 그녀의 손에 들린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한참 동안 휑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물미역처럼 늘어졌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약간 구불구불 멋스러워졌다.
"패션의 완성은 헤어스타일이죠. 흐흣"
"얼굴 아닌가요? 난 어디서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아무렴 어때요, 지금 제게는 그렇단 거죠."
그때 마침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빼어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이 34평 정도는 되어 보였다. 거실에 아무 가구도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그는 초록색 우비를 입은 중국집 배달원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손바닥만 한 단말기에 카드를 꽂고 가격을 입력하니 곧 작은 영수증이 나오고 결제가 완료되었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우비를 입은 배달원이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콜라가 든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맛있게 드십쇼."
"네에, 조심히 가세요."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고 맛있는 냄새가 점점 다가왔다. 그녀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신문지를 가져와서 바닥에 넓게 펴서 깔았다. 그 위에 그가 짜장면과 짬뽕 그릇을 놓았다. 날이 서늘해서 그런지 그릇 위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싱크대에서 유리컵과 젓가락을 챙겨 와 바닥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집에서 넣어준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역시, 짜장면은 나무젓가락으로 먹어야 제맛이지!"
"그런가요? 요즘 환경문제가 심각해서. 되도록 집에서 쓰는 젓가락 쓰게 되더라고요."
"거참, 자꾸 환경론자들의 논리에 휘둘리면 안 된다니까요. 가끔씩 이렇게 나무젓가락도 쓰고, 종이컵도 쓰는 거지. 너무 야박하게 살지는 맙시다."
"그래도, 요즘 기후변화도 심하고. 신경이 자꾸 쓰이네요."
"허허, 불겠어요. 일단 들자구요."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후루룩 쩝쩝 먹기 시작했다. 하긴 시간이 벌써 저녁 8시가 훌쩍 넘었다. 그녀는 일단 수저로 매콤한 빨간 국물을 후루룩 먹었다. 하아, 너무 매콤해서 그녀는 눈물 콧물이 날 지경이었다.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그런지, 짬뽕에 들어있는 해물은 고작 오징어랑 모시조개뿐이었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짜장면 혼자 다 먹게요? "
그제야 그는 바닥이 거의 드러난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짬뽕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렇죠. 같이 나눠먹으면 좋잖아요."
그녀는 슬쩍 바닥이 드러난 짜장면 그릇을 보고는 뾰로통해졌다.
"그냥, 이것까지 혼자 다 드셔욧."
그녀는 짬뽕그릇까지 그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심통이 단단히 났나 보다.
"배 고프다면서요?"
"됐으니까, 혼자 마음껏 드세요."
"아니, 무슨 먹는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요?"
그녀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고 거실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배는 무척 고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속해서 주르륵주르륵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자니, 아까 욕실에서 혼자 청승 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배 고픈 것도 못 참고 화를 낼 거면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무거워져서 그녀의 두 뺨 위로 빗물처럼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코가 시큰거리고 목이 뜨겁고 가슴이 북받쳐 올랐고 이내 그녀는 엉엉 울고 말았다. 그는 짬뽕그릇을 받아 들고 먹다가, 그녀가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짜장면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 내어 울다가 말했다.
"짜장면 때문이 아니에요.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요."
그는 휴지로 입을 쓰윽 닦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욕실에서 그녀는 두 시간 내내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을 맞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까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떠올랐다. 예고 없이 갑자기 터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차라리 잘 된 것 같았다. 가슴속 응어리가 이렇게라도 밖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진정이 된다면 차라리 실컷 울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가 차분해지는 듯싶더니, 갑자기 짝짝짝 박수소리가 들렸다.
"방금 모기 잡았어요. 빨간 피를 머금은 모기요."
그녀의 손바닥엔 밤새 그들의 피를 빨아댄 모기의 흔적이 있었다. 기나긴 여름이 이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