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7
포커페이스
(라운드 7)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이 남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모두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욕을 했는데, 오직 이 남자만은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녀를 데리러 와줬다. 심지어 풍족하지 않은 형편에도 그녀를 먹이고 재우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녀에게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저 멀리 있던 친구에게까지 그녀의 기분이나 생각이 전달된 거라면, 분명 이 남자도 그걸 느끼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물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이 남자의 호의는 과연 무엇을 담보로 하는 것일까? 세상에 공짜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당장 어디 갈 데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놈의 모기가 우리 피를 엄청 빨았나 봐요."
그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 짓눌린 모기 한 마리가 유난히 새까맣고 터져 나온 피는 너무나 새빨갰다. 그리고 그의 '우리'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의 선의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독한 상처와 아픔에 깊이 빠져있었기에 그 외에 것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아니, 더 나아가 그녀를 향한 그의 자연스러운 호의가 절박한 그녀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와 다른 생각들을 압도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 남자는 믿어도 되는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 그 공식이 정말인지 아닌지 검증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라고 하니까, 갑자기 벼룩에 대한 시가 생각나네요."
"벼룩이요?"
"당신의 피와 나의 피가 이 벼룩의 뱃속에서 하나로 섞였다..... 뭐, 그런 내용의 이상야릇한 시가 있어요."
"오호, 신박하네요. 흐흣."
"17세기 초에 쓰인 헛소리랍니다."
그녀는 다소 불쾌한 기분을 그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정작 상대방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싱글벙글했다. 그녀의 텔레파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비록 시를 빌려서 표현하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까는데도 그게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구별도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일까.
포. 커. 페. 이. 스.
그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과 그의 이름뿐이었다. 만약 그가 포커페이스라면, 그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지내야 하는 것일까.
"저기, 지훈 씨?"
"네? "
그가 놀란 눈으로 뚫어져라 내 입을 쳐다보았다.
"지훈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이제 와서 좀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는 있겠지만, 무척 궁금해졌어요."
"글쎄요, 제가 어떤 사람일까요?"
"에이, 제가 물어본 걸 그렇게 되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대답하기 난감하니까요."
"난감하다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너무 뜬금없죠?"
"솔직히, 뭐부터 어떻게 이야길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제가 연희 씨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음, 그건 그렇네요. 그럼, 우리 맥주 한 잔 하면서 진실게임 해볼까요?"
"뭐, 원한다면...... 좋아요, 근데 안주가 변변치 않아서."
그는 냉장고를 열어서 안을 훑어보며 말했다.
"과일칸에 사과 그대로 있던데. 제가 준비할게요."
"그래요, 그럼."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와 사과를 꺼내 싱크대에 놓았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가 사과를 깨끗이 씻고 작은 칼로 사과를 먹기 좋게 잘라서 쟁반 위 접시에 놓았다. 이를 지켜보던 그가 쟁반에 시원한 맥주캔을 담아서 거실로 옮겼다. 금방 뚝딱, 거실 바닥에 술판이 벌어졌다. 그는 아까 그녀가 언급한 이상야릇한 시를 떠올리며 선창을 했다.
"모기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을 위하여, 건배."
"건배!"
공중에서 맥주캔이 서로 부딪히자, 시원한 갈색 액체가 살짝 튀었다. 조용한 거실에서 한 동안 꿀꺽꿀꺽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목이 말랐나 봐요. 아흐, 시원해."
"안주 좀 먹으면서 마셔요. 진실게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네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여섯 캔의 맥주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걸 다 마실 생각은 아니죠? 배 부를 텐데......"
"물이야 빼면 그만이죠.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녀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그에게 말했다.
"음, 먼저 순서를 정하죠. 룰은 알고 있죠?"
"그래요. 질문에 답을 못하면 원샷인 거죠?"
"맞아요. 그럼, 가위 바위 보!"
그녀는 가위를 냈고, 그는 바위를 냈다. 크고 단단한 바위는 제 아무리 날카로운 가위로도 자를 수 없는 것일까.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부터네요? 음, 혹시 연희 씨는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아....... 그게......"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해서 무슨 질문부터 어떻게 접근해 나가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그는 난데없이 사랑타령이다. 그녀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절절한 사랑이라....... 갑자기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그녀의 오래된 과거로 날아가야만 했다. 아주 어릴 때 몰래 좋아하던 남자아이는 있었다. 그 아이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고 쭈뼜쭈뼜 거릴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그녀가 떠올랐다. 하지만 절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인사이동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좋아하던 그 아이를 볼 수 없게 돼버렸다고 엉엉 울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좀 더 커서 사춘기 시절에도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긴 있었다. 담임선생님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는지 그 아이에게서 니코틴 냄새가 많이 났다. 호리호리한 그 아이는 매번 준비물이나 숙제를 안 해와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왠지 그녀는 그런 그가 좋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니코틴 냄새까지도 싫지 않았나 보다. 그 아이와 어쩌다 운 좋게 짝꿍이 된 적도 있었는데, 그녀는 얼마나 설레고 좋았는지 모른다. 그 아이가 또 책을 놓고 온 날에는 그녀의 책을 가운데 놓고 함께 보기도 했는데, 나란히 앉은 그 아이와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고 그만큼 깊게 베인 니코틴 냄새도 강렬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게 되면서 그 아이를 더 이상 한 교실에서 만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와 그녀의 워크맨에 연결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아쉽고 그립지만, 그러나 그뿐이었다. 도대체 절절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어라? 설마...... 없는 거예요? 아니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는 건가?"
자꾸만 시간이 지체되자, 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야 있었지만..... 그렇게 절절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원샷해야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지, 잘 모르겠다뇨."
그녀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맥주캔 뚜껑을 따서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이 나이 먹도록 절절한 사랑도 못해보고 어디서 두들겨 맞기나 한 그녀 자신이 답답했다.
"근데, 이거 너무 배가 부르긴 하네요. 좀 쉬엄쉬엄 마시면 안 되나?"
"뭐, 그러든가....... 요. 방금 은근슬쩍 반말한 거 알아요?"
"아, 쏴리. 아까 지훈 씨가 던진 질문이 제 가슴을 후벼 파네요."
"뭐, 그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진실게임의 맛이란 이런 거죠. 먼저 제안한 건 그쪽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아, 네네."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 슬쩍 말 좀 놓았다고 정색을 하고 지적을 하다니. 저 사람, 꼰대 스타일이었나. 아차,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어떤 질문을 할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한 방이어야 하는데. 먼저 그가 그녀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밝혀내야 한다.
"지훈 씨, 제가 많이 다친 날...... 절 데리러 와주었잖아요. 그날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죠?"
"그야 연희 씨 아버님이 대충 이야기해 주셨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기 전에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걸 이야기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그들은 진실게임을 하고 있으니,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이 순간에 맥주를 마시는 것도 너무 이상할 것이다. 꼭 뭐라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렇다면.
"알고 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일 때문에 거길 갔어야 했어요. 하지만 연희 씨가 그런 일을 겪는 모습을 보고도 나설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저는 연희 씨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요."
"아....... 그랬군요."
"아버님이 오셔서 연희 씨를 거기서 데리고 나가는 걸 보고......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를 향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그녀가 질문한 의도는 오리무중이 된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그 질문을 무사히 빠져나갔고 심지어 미안했다는 감정까지 그녀에게 전달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는 차라리 그녀가 모르고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좋아요, 알겠어요. 어쩌죠, 술은 못 마시겠네요."
"다음 기회를 노려보죠."
"다시 지훈 씨 차례예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심각해지면 곤란해요. 술맛이 중요하잖아요? 그럼..... 만약 과거의 어떤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연희 씨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는 그녀가 정말 좋았던, 행복한 기억을 끄집어내길 바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가 자꾸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 속에 허우적 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너무 슬퍼졌다. 마침 거실 창 밖엔 어둠이 밀려와 있었고, 그는 당황스러웠다. 그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연희 씨, 괜찮아요? 안색이...... "
"싫어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
"연희 씨...... "
"좋았던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시는 이런 일, 겪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어두운 거실 바닥에 앉은 그녀의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다 이내 또르르 흘러내리고 다시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난 그저..... "
그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다가,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가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힘없는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잔잔하던 그의 마음에도 파동이 일었다. 그녀를 꼭 안아주면서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 일 없어요. 그때로 다시 돌아가는 일, 절대 없어요."
그들의 진실게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