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8
텔레파시
(악몽 - 라운드 8)
짙은 어둠이 내린 창 밖에 초승달이 떠있다. 그리고 젊은 두 남녀가 어둠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여자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혀 반짝이는 것을 남자는 가까이서 바라보며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느꼈다. 초승달이 뜬 가을밤이라서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하얀 얼굴이 정말 아름다워서였을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요."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여기서 만큼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지내라고. 더 이상 아무도 그녀를 해치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괜찮은 거라고.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서 세상물정 모르는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을 잤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뭔가 달달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꿀이라도 발라 놨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조심히 바닥에 눕히고 서둘러 안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지켜봤다. 미인은 아니지만, 오밀조밀하면서도 조화로운 얼굴이다. 가느다란 눈썹, 동그란 눈,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아보기로 한다. 잠이 든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건 그 답지 못한 비겁한 짓이다.
그건 그렇고 이 여자는 왜 아까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일까? 마치 '넌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잖아.'라고 따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당시 그녀와 어떤 관계도 아니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 한편이 콕콕 아팠다. 날카로운 가시가 그를 자꾸 찌르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지만, 울면서 아파하는 그녀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멍청한 사기꾼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단약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 말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그게 최선이니까.
그녀는 꿈에서도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숨을 헉헉 대면서도 두 팔을 휘저으며 무거운 두 다리를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마치 영화 속 좀비들처럼 그들은 그녀를 향해 무섭게 달려왔다. 그녀의 두 발이 자꾸만 땅바닥에 붙어버렸고, 더 이상 한걸음도 옮길 수 없던 그녀는 그렇게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 좀비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먹잇감을 포획한 짐승들처럼 그녀의 온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싫어서 소리를 질렀다.
"싫어...... 안돼....... 저리 가......!"
그녀는 공중에 팔까지 흔들어 가며 연신 싫다고 난리였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은데, 그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다섯 시 밖에 되지 않았다.
"싫어......"
그녀는 자꾸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두 손이 차디 찼다. 결국 그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꿈속에서 조차 위험에 빠진 게 분명했다.
"연희 씨, 정신 차려요. 연희 씨, 내 말 들려요?"
"으악!"
그녀는 잠에서 깨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두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연희 씨, 괜찮아요. 그냥 꿈이에요."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저를 핥고 깨물었어요. 흑흑...."
그는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꼭 안아 주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포옹이 지금 그녀에게 필요해 보였다. 그녀의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고스란히 그에게 느껴졌다. 그는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며 눈물이 났다. 그동안 딱히 웃을 일도 없었고, 울 일은 더더욱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반복되는 세상 속에 하나의 작은 부품이 되어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세상은 온통 흰색, 검은색, 회색, 그렇게 세 가지 색깔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에 그녀는 자꾸만 돌을 던졌다. 그녀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그의 마음에 점점 파문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체가 그 돌맹이었다. 그녀는 세상 속에 온몸을 던져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거친 암초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던 그녀가 잔잔한 그의 마음속으로 풍덩 던져졌다. 그렇게 그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는 죽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어느덧 창 밖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늘 그렇듯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며 아침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 곧 출근할 시간인가?'
그는 품 속의 그녀를 바라보며 오늘은 연차를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세상이란 톱니바퀴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하루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했다.
"오늘 토요일이죠? 혹시 출근해야 해요?"
"아....... 아뇨. 오늘 쉬어요."
어쨌든 그는 그녀를 위해 연차까지 내려고 했다. 비록 그럴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있다는 것을.
"뭐 좀 마실래요?"
"아뇨, 그냥 이대로 좀 더 있어줘요."
그녀는 그의 품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은근히 우디 머스크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새끼 강아지가 엄마의 젖을 찾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향수 써요?"
"아뇨, 그냥 스킨로션만 발라요."
그가 그녀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참 좋은 냄새가 나요."
그녀도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음침한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경쾌한 기운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그들은 마치 함께 굳어 버린 오래된 화석처럼 그들만의 시간 속에 멈춰 있었고, 그 위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거 알아요?"
"그거요?"
"꿈에, 지훈 씨가 저에게 키스했어요."
"아........ 그랬군요."
그는 살짝 당황했지만,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었다.
"네에, 그때까지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
그녀는 악몽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이 몸서리치며 말했다.
"그런데, 지훈 씨와 키스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서 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 지훈 씨는 사라지고 제 곁에 없었어요. 저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가 저에게 떼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어요."
"아....... 꿈 속이긴 하지만, 미안해요. 난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모르겠어요. 그렇게 한참을 달렸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달려왔어요. 그러다 지쳐서 넘어졌는데, 사람들이 사방에서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저를 먹거리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를 핥고 깨물고 씹고..... 흑흑."
"연희 씨, 힘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많이 무서웠겠어요. 에휴...... "
"생생해서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어쩌죠? 심지어 너무 아프기까지 했어요."
"그럼, 이건 어때요? 정 힘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거예요."
"글쎄요...... 생각해 볼게요."
그는 하루빨리 그녀가 지독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심리상담사나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문가니까,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고 합리적으로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와 생각이 좀 달랐다. 물론 전문가는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을 테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으로 생긴 상처나 아픔은 오로지 사람으로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만약 그녀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단지 어떤 사람의 힘 만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냉장고에 먹을 게 없을 것 같은데..... 우리 장 보러 갈래요?"
"좋아요. 맛있는 거 해 먹어요 우리."
그녀가 스르륵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그녀와 함께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반드시 우리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함께라는 것이 때로 아프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서로 정답고 행복하다면,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는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그녀를 마주 대할 수 있을까.
"다음 선수 입장하셔요."
그녀가 세수를 해서 맑아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네네, 선수 입장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