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9
미행
(라운드 9)
"삼겹살 구워 먹을래요? "
카트를 밀면서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좋아요. 그럼, 상추도 사야겠네요. 쌈장도 필요할 테고요."
그녀는 오랜만에 고기를 맛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야채 코너에 멈춰서 비닐봉지에 적당히 상추를 담았다. 상추가 생각보다 꽤 비싸서 놀랐다. 이걸 카트에 넣을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여기 깐 마늘도 있네요. "
그가 무심히 한편에 놓여있던 깐 마늘 한 봉지를 카트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상추 한 봉지도 받아서 카트에 넣으며 말했다.
"삼겹살은 얼마나 살까요?"
"2만 원어치 사면 넉넉할 거예요. 맥주도 가져올까요?"
"저기 끝쪽에 있을 거예요. 넉넉히 부탁해요."
그가 정육코너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맥주를 사기 위해 마트 끝쪽을 향해 걸어갔다. 마트가 크고 넓어서 한참 걸어야 했지만, 오랜만에 각종 먹거리와 식료품들을 구경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런데 그녀는 자꾸만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만의 착각인가 싶었지만, 분명 누군가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걸으면 누군가도 걸었고, 그녀가 멈추면 누군가도 멈췄다. 그녀는 마트 끝쪽 모퉁이에서 몸을 휙 왼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진열대 뒤에 숨어서 그 누군가를 몰래 살폈다. 검은 재킷을 입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점점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지만, 심호흡을 하고 6개 한 묶음 알뜰형 맥주를 품에 안고 반대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겨우 반대편 모퉁이를 돌아서 다음 진열대 사이를 지나려는 순간, 왼쪽을 바라보자, 아까 그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짐짓 그녀를 모르는 체했지만, 그녀는 분명 그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옆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음 진열대로 걸어갔고, 두근거리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붙들고 그가 기다리고 있을 정육점 코너로 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진열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미 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검은 재킷의 사내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입가에 손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면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는데, 마침 정육점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가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녀와 발을 맞춰 차근차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졌고, 계산대 앞에 늘어선 줄에 이르렀다. 검은 재킷의 사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계산대 가까이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 그와 그녀는 카트에 있던 것들을 계산대 위에 모두 올려놓았다. 계산원이 신속하게 바코드를 찍고 나서 말했다.
"5만 7천300원입니다, 봉투도 필요한가요? "
"네, 쓰레기봉투 한 장 부탁드려요. 카드 일시불이요. "
"포인트 번호는요?"
"그건 없는데요."
"여기 핸드폰번호 입력해 주세요."
그는 단말기에 번호를 입력하고 쓰레기봉투에 식료품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아직도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마트를 빠져나왔다.
"아까 그 검은 재킷, 저를 계속 따라왔어요."
"그럴 리가요. 연희 씨가 착각했을 거예요."
"아니에요. 저랑 눈도 마주쳤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냥, 느낌일 뿐이겠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마지막엔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자자, 어서 집에 가서 삼겹살 파티 합시다."
그녀는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확실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이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뒷좌석에 두툼한 봉투를 올려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녀는 자꾸만 떠오르는 의구심을 떨치려고 애쓰며 보조석 문을 열었다. 마침 그는 누군가와 통화하던 중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그녀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는데, 아까 그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어디에도 숨지 않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의 검지손가락을 세워 그의 입에 댔다. 그녀는 검은 재킷이 그녀를 뒤쫓았고 그녀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 그 사이 운전석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는 주차구역에서 차를 빼내어 마트 옆 도로에 들어섰다.
"운전 중이라, 나중에 다시 통화하시죠."
"무슨 일 있어요?"
"아뇨, 회사일 때문에요."
그녀는 아까 그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왠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회사일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누군가와 통화 후, 그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운전하는 내내 다소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그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고, 그제야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집에 왔네요. 미안해요. 급하게 생각할 것들이 있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뒷좌석에서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녀도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면서 차 문쪽에서 쓰레기를 꺼냈다. 외부세차는 물론이고 내부세차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녀는 왼손에 움켜쥔 작은 쓰레기들을 일단 그녀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와 그녀 사이에 알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계속됐다. 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어 들어갔고 그 좁은 공간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4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을 때, 그녀가 먼저 기나 긴 침묵을 깨고 말을 던졌다.
"혹시, 쌈장은 넣었나요?"
"그럼요, 쌈장 없이 어떻게 삼겹살을 먹어요?"
"그렇죠, 저는 그냥 혹시 빠뜨렸을까 봐......"
그녀는 그의 다소 차갑고 공격적인 말투에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181818. 그녀는 그와의 그런 사소한 모든 일들이 그녀의 전부라도 되는 듯이 이곳에서 지냈었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이 먼지 폴폴 날리는 이 집도 그녀에게는 밝고 따스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거실 바닥에 쓰레기봉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씻는 동안, 먹을 준비 좀 해줘요."
"아, 그럴게요."
그는 안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와서 곧장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싸늘한 그의 태도가 서운했지만, 그의 말대로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쌀을 씻어서 밥솥에 넣고 취사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살짝 기름을 두르고 가스불을 켰다. 싱크대에 상추를 가져와서 물을 틀고 씻기 시작했고, 프라이팬이 달궈진 것을 확인하고 삼겹살을 넣었다.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삼겹살이 구워지는 동안 그녀는 상추와 마늘을 다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부엌에 삼겹살 냄새와 연기가 가득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가스레인지 위 후드의 배기 버튼을 눌렀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후드의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휴, 가스레인지 켜는 동시에 후드를 켰어야죠!"
"네, 제가 깜박했어요. 그래서 방금......"
"아파트라서 이런 거 특히 신경 써야 한다고요."
"그래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민폐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녀는 그의 입에서 '민폐'라는 말이 나오자,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동안 그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던 것일 테니까.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단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따뜻하던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려니 했다면, 이렇게 마음이 쓰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민폐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거실 창가로 걸어갔다.
"미안해요."
그녀는 살짝 열린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저녁 어스름이 아파트 공원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정자그늘에 어쩐지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검은 재킷의 사내가 정자그늘에서 나와서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뭐지,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그녀는 이 사실을 그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 검은 재킷의 사내에 대해 그에게 말하면 좋은 소리가 되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와 그녀 사이엔 소리 없이 벽이 쌓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녀를 자꾸 뒤쫓는 것일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마침 밥솥은 칙칙칙 거리며 밥이 거의 다 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한동안 치이익 하고 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나더니 집 안에 밥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밥그릇, 수저와 젓가락을 챙겨서 쟁반에 담았다. 다 구워진 삼겹살, 상추와 마늘, 쌈장도 챙겼다.
"안 먹을 거예요? "
그가 밥그릇에 다 된 밥을 떠서 거실 바닥에 앉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창가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그에게 말했다.
"배가 스르르 아프네요. 화장실 가야겠어요."
그는 그녀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상추에 삼겹살을 놓고 밥이랑 마늘과 쌈장을 얹어 크게 한쌈을 입에 넣었다. 그의 양볼이 이리저리 씹느라 볼록해졌다. 그녀는 검은 재킷의 사내가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아서 몸이 너무 아팠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한 사람에게 들은 친절하지 못한 말 몇 마디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 집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는 정말 별것 아니었을까. 갈급하고 절박했던 그녀에게는 잠깐 그가 보여준 친절이 특별한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리고 이제는 그녀를 돌보는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른 것일까. 그건 그렇고, 검은 재킷의 사내는 왜 자꾸 그녀를 쫓는 것일까? 모든 것이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