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라운드 10

by 진화정

유령

(라운드 10)



그가 거실에서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동안, 그녀는 변기 위에 앉아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바지주머니 속에 넣었던 쓰레기가 생각났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들을 꺼냈다. 주차영수증, 주유영수증, 믹스커피 마신 종이컵, 그리고...... 조금 특이한 내용이 담긴 명함.


'박지훈, 생체의료부품담당 연구원.'


그의 명함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말하지 않는 한, 그녀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는 '첨단동 테크노빌리지, B동 306호, 생체의료부품처리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연필로 급하게 흘겨 쓴 메모가 보였다.


'오연희, 카데바'


그녀는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손으로 두 눈을 연신 비비다가 다시 명함을 바라봤다. 거기엔 그녀의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이 왜 여기에?'


그녀는 '카데바'가 무슨 뜻인지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의학 교육과 연구 목적으로 기증받은 해부용 시신'. 그것이 카데바의 정의였다. 과연 그녀와 카데바가 무슨 연관이 있길래, 하필이면 그의 명함 뒤편에 쓰인 걸까? 그녀는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숨을 쉬고.....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접근할 때,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었던 것이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하던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링 위에서 사람들로부터 큰 타격을 입고 쓰러졌고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고 그럴만한 행동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녀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녀를 '민폐'라는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인식이 마치 진실로 만연한 세상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불리하고 합당하지 않은, 어쩌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새롭고 안전한 장소로 피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이 잠시나마 그의 집, 아니 그의 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날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는 멈칫했다.


대가 없는 호의.

그가 과연 그녀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 만한 사람인가. 그는 그녀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사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몇 번 그의 집 근처에 놀러도 왔었다. 그래서 그의 집이 어디 있는지도 이미 알았지만, 그의 집 안까지 들어온 건, 그녀가 링에서 넉다운이 된 그날이다. 여자와 남자로 여러 번 만나기는 했었지만, 그녀는 그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가족은 누군지, 그의 직장이 어딘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그의 전화번호와 그가 영화 보는 것과 먹는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그날 그녀를 데려가라고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그녀의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어떻게 바로 그녀에게 달려올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그녀는 여전히 변기 위에 앉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매고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도 더 이상 어린아이는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리 납득하기 힘든 세상이라고 해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정의와 상식이 통하길 간절히 바랐는데.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상황에서 어떤 그림도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때, 한동안 조용하던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망자를 위해 건배.'


망. 자.

잊힌 존재, 죽은 사람. 그녀의 생각이 옳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그와 그녀는 이렇게 엮이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의 명함으로 알게 된 그의 직업에 주목해 본다. '생체의료부품담당' 연구원. 그것이 어쩌면 그와 그녀의 연결고리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특수한 상황, 그녀의 텔레파시 능력 때문에 그가 그녀에게 일부러 접근한 것이라면? 이상하게도 말이 된다. 그는 그녀의 텔레파시 능력을 이용해 어떤 생체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그런 연구를 위해서는 그녀 자신의 동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했지만, 그녀가 동의를 해줄지도 미지수였고, 그보다 그녀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연구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신빙성을 가진 연구로써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는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이어야 했던 것이다. '카데바'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의학연구용 시체나 다름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서 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상태. 어디 가서 직업을 구하거나, 밥을 사 먹거나, 잠을 잘 수도 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의존적인 상태로 만들어야만 그녀를 곁에 붙잡아두고 아무런 방해 없이 필요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던 것일까?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흰 셔츠 뒷면에 그려진 글씨를 떠올렸다. '국립뇌과학연구단'. 그는 아마도 사람의 뇌와 인지능력 및 트라우마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날 링에서 경험한 사건은 지금도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계속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왔다. 바로 그때, 카톡이 하나 더 왔다.


'여어, 빙고!'


드디어 지금까지의 많은 수수께끼가 풀렸지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어떻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건지, 더구나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그에게 이런 배신을 당하고도 정작 그녀는 이곳을 벗어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분하고 슬펐다. 무엇보다 국책사업이라면, 이미 정부에서 그녀를 계속 주시 내지는 감시해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그 검은 재킷의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그가 정부소속이라면 굳이 그렇게 숨어서 그녀와 접촉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남을 연출할 수도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재킷의 사내는 정부소속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아, 잠깐만요."


삼겹살을 다 먹었는지, 화장실이 급했는지, 그가 욕실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싸지 않았지만, 급하게 변기물을 내리고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서 세수를 했다.


'정신줄 놓지 마. 어떻게든 구멍이 있겠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며 긍정회로를 돌렸다. 아무래도 검정 재킷의 사내는 정부 측과 입장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어쩌면 그녀에게 유리한 제안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섣불리 그녀와 함께 있는 그에 대해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에게도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초승달이 뜨던 밤, 그녀 곁을 뜬 눈으로 지켜주었던 그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바로 잡았다. 아직 그와 그녀에게는 이 모든 문제들을 바로 잡을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녀는 속으로 하나님을 불렀다. 철저히 세상과 분리되어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아픔과 슬픔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일들에 대해서 그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실 테고 그녀를 끝까지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면서 전등과 환풍기 스위치를 껐다. 지금 차고 넘치는 그녀의 근심, 걱정, 그리고 눈물도 작은 버튼을 누르듯 쉽게 꺼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고프면 냉장고에 삼겹살 뒀으니 구워 먹어요."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는 그 말을 던지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보이는 것만큼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가 하는 일에 그녀와 얽혀서 상황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은 별나라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그녀 앞에서 달나라 사람인 것처럼 굴어야만 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그도 지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지금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무리 파고들고 쥐어짜봤자, 그녀 자신의 틀 안에서 뱅뱅 돌 뿐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말아야지.





그녀는 배가 고팠지만, 삼겹살을 굽지는 않기로 한다. 투명한 물컵에 시원한 생수를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왠지 그 투명한 물컵의 운명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나약한 감상 따위.'


자꾸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이 세상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아무 죄가 없다. 그녀 또한 다른 아기들이 그러하듯 무해한 손님으로 이곳에 왔고, 그녀 자신의 존재와 그 타당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증명해야 할 만큼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전혀 없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고 사랑을 주기에도 충분하다. 단지 누군가의 이기심이나 시기심에 의해 조종당하거나 이용당하기에 그녀는 아직 순수하고 당돌하다. 그녀는 그녀답게 존재하는 법을 서서히 배우고 익히는 중이다. 비록 길 가에 버려진 돌멩이처럼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굴러가고 부딪히더라도 그녀는 이 또한 멋지게 견뎌내고 성장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그녀는 거실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빈 도화지 같은 천장을 바라본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지금 유령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직 기회는 있다.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다면 어떨까. 그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된다면. 그녀의 침묵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미래가 된다면. 그녀는 기꺼이 영원히 유령으로 남을 것인가. 만약 그녀의 죽음이 뒷걸음질 치던 개의 발에 밟힌 개미의 죽음보다 못한 것이 된다면. 만약 그녀의 침묵으로 수많은 무고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면. 기꺼이 유령으로 남겠노라는 그녀의 선택이 결국 바보 같은 짓이라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신이 아니야. 단지 사람일 뿐인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자유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이 미칠 사회에 대한 파장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녀는 그저 있는 그대로 그녀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 하고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 하고 맞으면 맞다 하고 아니면 아니다 하고, 그러면 그만인 것을. 그녀가 굉장한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뭘까. 그녀가 이 순간 홀연히 변신해서 예수나 부처나 공자가 되어 어둔 세상을 밝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이나 김구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바꿔야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토록 그녀가 그녀답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이 세상에 그녀가 이렇게 태어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저 이런 그녀라도 신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삶이라도 충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아니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 주길 바라는 누군가의 바람일까.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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