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그리고 폭로

모비딕을 읽고

by 진화정

풋내기 대학생 시절, 아마 2005년이었던 것 같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했었는데, 블로그에 업로드해 놓은 게 있었다. 그중, 순수하게 내 생각을 적어놓은 것을 떼어서 기록하고자 한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으므로.




과연 ‘흰색’은 어떤 것이냐고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누군가 손을 들고 “흰색은 순수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흰색은 순수의 색이다. 그것은 미지와 동경의 색이다. 하얀 눈송이, 하얀 사과 꽃, 하얀 블라우스, 하얀 머리카락, 하얀 그녀의 손가락, 하얀 물거품, 그리고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의 이미지. 그런 소박한 하얀 이미지는 우리의 간절한 혹은 무심한 기대와 무한한 상상 속에서 얽히고 뭉치고 단단해져 하나의 거대한 흰색의 고래가 되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흰색의 고래가 깊고 푸른 바다 한가운데서 뽀얀 물살을 일으키며 장난스러운 춤을 추다가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신비스러운 고래가 분명 심오하고 절대적인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떤 확신으로 다가왔고 그 거부할 수 없는 존재를 찾아 바다로 나서야 했다.


잠시 후 다른 학생이 손을 들고 “흰색은 가능성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흰색은 가능성의 색이다. 그것은 기회와 다가올 미래의 색이다. 하얀 도화지 위에 빨강, 노랑, 초록의 물감을 풀어 넣으면 그 위에는 푸른 대지, 맹수들과 뛰노는 벌거벗은 남녀와 새빨갛게 익어가는 탐스러운 열매가 나타난다. 나의 의지와 신념대로 그곳엔 그토록 그리던 황홀한 에덴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과 같았다.


무한한 자유로움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 보니 어느덧 열두 시가 넘어버렸고 황홀한 에덴은 썩은 호박으로 변해버렸다.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빽빽한 색깔들은 서로 덧칠해지고 쏟아져 나와 본연의 색을 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시커먼 괴물이 되어버렸다. 흰색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희망에 부푼 색이지만, 그만큼 쉽게 변질되고 더럽혀지고 결국 사라져 버린다. 애초부터 흰색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었으나 그것은 병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를 그 거대한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잠식해 버렸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흰 고래의 길고 어두운 식도를 아무런 대책 없이 걸어가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우리가 무엇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질펀한 쾌락에 취해 죽음에 대한 경고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스스로 뒤뚱거리며 좁은 화강암 관 속으로 들어갔던 포르투나토처럼 우리는 자만심과 경쟁심으로 인한 집착, 광기와 그리고 진정으로 시급한 진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차갑고 어두운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침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교수님께서는 모비딕의 흰색이 의미하는 바를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문득 출항하기 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고 얘기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와 같은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엘리야! 그래, 누더기 차림의 엘리야는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와 같은 영혼의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스마엘이 피쿼드 호의 선원이 되겠다는 계약을 하려고 했을 때,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피쿼드 호에 오르려는 이스마엘의 손을 붙잡고 다시 만류한다. 다음에 만날 때는 심판의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의 이야기를 이스마엘은 그저 보잘것없는 미치광이의 지껄임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엘리야의 예언은 결국 성취되었던 것이다.


Who's there? 어둠 속 저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 감춰진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바로 영혼의 눈으로 진실을 마주하려는 의지이다. 억울한 죽음, 그늘진 시대, 바로 왜곡되고 은폐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세상을 배회하는 혼령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는 어디에 있는가? 검푸른 바다에 파묻혀 버린 피쿼드 호라는 관(coffin, casket)의 비밀을 육지의 사람들에게 밝혀줄 그 누군가로서 이스마엘은 선택받았다. 열린 마음을 가진 이스마엘은 죽음의 순간에 퀴퀙의 부표를 붙잡았고 극적으로 구조된다. 상어 떼도 그를 해치지 않고 옆을 헤엄쳐 다니고, 흉악한 독수리도 조용히 지나가는 모습은 마치 예정된 성스런 신의 섭리를 나타내 주는 듯하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던 라헬 호는 아무런 상관없는 고아, 이스마엘을 발견한다. 신의 섭리에 불순종했던 어머니 라헬과 이집트 몸종의 아들로 태어나 아브라함에게 버림받았던 이스마엘의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평등과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미국은 자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의 섭리에 거슬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얀 아메리카 드림은 광기 어린 살육의 작살, 불평등한 노예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로 인하여 붉게 물들었고, 그런 죄악의 역사를 반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질주했다. 파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삭도 아니고, 모합도 아닌, 이스마엘인 것은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인 침략과 비도덕적 악행들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의식의 상징이고,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일차적 죽음을 경험하고 이차적인 새로운 탄생을 맞이한 이스마엘은 영적인 눈을 통하여 이 시대의 광기와 거짓을 세상에 폭로하고 진정한 화해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메신저의 사명을 작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아닐까?


12시가 가까워지자 수업은 끝났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신 허연 밥이 너무나 간절해졌다. 연두색 완두콩이 들어간 약간은 진 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교실문을 나섰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그 땅에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고자 했다. 독립선언서에도 "모든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된 권리를 가졌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미국은 지금 어떠한가?


세계 최강의 경제, 군사, 문화 강국이 되었지만, 그들은 자본을 신격화했고, 군사 패권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전쟁을 이용해 무기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문화적으로도 타락했다. 기독교 국가로 세워져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식이 이뤄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신의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동성혼, 젠더 이데올로기가 일반화되었고, 교육뿐 아니라 종교에까지 큰 파장을 미치고 있다. 이제는 어린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부모가 이를 만류하면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의사가 생물학적 근거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 이야기해도 처벌대상이 되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설교내용을 빌미로 목사가 쫓겨나는 실정이다.


트럼프는 성 정체성 관련 정책들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으나, 극단적 자국 중심의 정책을 내세워 혐오와 갈등을 조장했고, 보수 복음주의와 연합했지만, 그의 방식은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진리보다는 자본과 권력에 무게를 두고 있고, 이스라엘에 편중된 정치를 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은 이란을 침공했고 언론은 '핵전쟁의 위기'라며 난리다. 그들의 욕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런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날이 머지않은 것만 같아서 몹시 슬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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