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돈풀기, 다른 결과

상래가 종이에 10이라고 적는다. 그 종이를 들고 상래는 아린에게 간다. 아린은 그 종이를 받고 상래에게 사과 하나를 준다. 아린은 왜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종이를 받고 먹을 수 있는 사과를 내주었을까? 아린은 그 종이를 시은에게 주면 시은이 오렌지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은은 왜 상래가 만든 종이를 아린에게서 받아 오렌지를 내주었을까? 시은 역시 형아가 그 종이를 받으면 수박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종이를 다른 사람이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바로 이 믿음이 현대 사회의 화폐를 지탱하는 지지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그 종이를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다. 모두가 받아주면 화폐가 되고, 일부만 받아주면 교환 수단은 급격히 약해진다. 화폐의 가치는 종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이를 받아주겠다는 신뢰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에 달려 있다.


얼마 전 이집트를 여행하며 이런 경험을 했다. 관광지도 아닌, 사막 한가운데 수백 킬로미터 이어진 도로 옆의 작은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그곳에서도 달러 결제가 가능했다. 아무 설명이 필요 없었고 달러를 내미니 점원은 아무 망설임 없이 음료수를 내주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휴게소에서 달러 대신 한국의 만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면, 그 점원은 과연 음료수를 내주었을까? 이제 무슨 종이인지 어이 없어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지폐가 진짜인지, 어디에서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에게 1인당 2,000달러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민생 회복 소비쿠폰이라는 이름으로 전 국민에게 15만 원에서 25만 원을 지급했다. 두 정책 모두 국채를 발행하고, 그 국채를 담보로 화폐를 공급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구조는 유사하다. 겉으로 보면 같은 돈 풀기 정책이다. 하지만 결과가 같을 수는 없다.


달러는 미국 국민만 쓰는 돈이 아니다. 달러는 전 세계 무역의 결제 수단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한국에 원유를 팔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얄화나 한국의 원화가 아니라 달러가 사용된다. 에너지와 원자재 거래의 기준 통화가 달러이기 때문이다. 달러는 또한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하는 외환보유액이며, 위기가 닥칠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통화다.


즉, 달러를 받아주겠다는 믿음의 범위는 미국 국경을 훨씬 넘어 전 세계로 확장돼 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종이 한 장에 100이라는 숫자를 적어 이탈리아에 가면 올리브를 받을 수 있다. 그 종이를 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종이로 다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의 가치는 종이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가 어디에서든 통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2025년 말 원달러 환율은 1,500원에 근접하며 원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 등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요인들로 인해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인 달러 인덱스는 상당 폭 하락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원달러 환율이 상승했다는 것은 원화의 가치가 달러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올해 국고채를 약 225조 원 추가로 발행할 계획이다. 기준금리 역시 인상할 조짐이 뚜렷하지 않아, 올해 내내 미국 기준금리보다 낮은 수준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부가 종이에 아무리 100이라고 적는다 해도, 전 세계에서 그 종이를 가치 있는 재화나 서비스와 기꺼이 바꿔줄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같은 돈 풀기 정책이라도 통화가 받아들여지는 범위와 신뢰의 크기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원화를 찍어 숫자를 늘리는 데서 답을 찾기보다 원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는 경제의 펀더멘털을 키우는 것이 지금 더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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