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장의 여자들
다시 사춘기 소녀가 되는 마술
깔깔대는 고음의 웃음이 연신 울려 퍼진다. 평상시 조용하던 당구장에 왁자지껄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요즘 많은 주민센터가 주민들의 문화생활을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컴퓨터, 외국어, 그림, 음악, 운동 등 배움이나 취미 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참여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령층이다. 본업을 하면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운 시간이 넘쳐나는 은퇴자들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그들에게 배움과 놀이의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수강료도 저렴하니 백수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도 딱 좋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어울리며 위축된 사회생활을 넓힐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나도 주민센터에서 개설한 당구를 배우고 있다.
내가 당구를 처음 쳐 본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였다. 남자들은 웬만하면 대학 시절에 당구를 배우기 마련이다. 7080 시절 대학생의 놀이 중에서는 탁구와 당구만큼 접하기 쉬운 운동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구는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운동이었다. 당구를 치면 으레 내기를 하게 된다. 경기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당구비까지 낸다. 서울에 홀로 와서 대학에 다니던 나는 당구 치기에 용돈을 쓸 만큼 여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당구장에 가면 늘 당구대 옆 의자에 앉아 그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친구들이 함께 하기를 권유하여도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며 넘어가곤 하였다.
은퇴자들이 모여서 다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은 당구가 으뜸이다. 힘든 운동도 아니고 실력이 달라도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우리 모임도 당구라는 공통분모 덕에 2년째 잘 유지되고 있다. 당구가 아니었다면 모여서 술이나 먹고 떠들다가 모임이 흐지부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모임의 당구 최하수가 바로 나다. 늦게 시작한 당구에 깊이 빠질 만큼 열정이 있지도 않다 보니, 당구 실력이 아직까지도 바닥을 헤매는 수준이다. 물론 핸디를 받고 게임을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수강자들 대부분이 남자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첫날 모인 수강자 20명 중 8명이 여자들이었다. 깜짝 놀랐다. 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었던 당구에 나이 많은 여성들의 관심이 이렇게 클 줄이야. 하기는 시대가 변하며 많은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성별로 막혀있던 장벽들이 하나둘 무너져 남자와 여자의 역할 구별이 모호해져 가는 시대에, 여자들이 당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남자 수강생들 중 완전 초보는 거의 없다. 나처럼 잘 못 치는데 좀 더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여자들은 모두 생초보들이다. 큐대를 쥐고 스트로크를 하는 방법부터 배운다. 강사가 시범을 보이기만 해도 그녀들의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당구장에 울려 퍼진다. 뾰족한 큐대에 맞은 공이 쿠션에 튕겨 목적구에 굴러가 맞는 순간, 놀란 토끼 눈으로 다시 한번 탄성과 유쾌한 웃음을 쏟아낸다. 큐대를 공에 정확히 맞히지 못하여 삑사리가 나면 "아이, 어떻게?"하며 발을 구르다가 까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고 보물을 발견한 모험가들처럼 완전 신나서 들떠 있다. 육십 대 여성들의 얼굴엔 십 대 소녀들의 발랄함이 잔뜩 묻어 나온다.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웃음이 나온다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그저 굴러가는 당구공에도 박장대소한다. 지난했던 삶 속에 묻혀 잊혀졌던 여자들만의 감성이 깨어나고 있다.
3주 차 되던 날 한 여자가 신난 표정으로 말한다. "당구를 열심히 배워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무슨 이유? 모두가 궁금해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사위에게 당구를 배운다고 말했더니, 장모님과 같이 당구를 치고 싶다고 했단다. "오우, 정말? 대박이다!" 모여 있던 이들이 부러움의 탄성을 지른다. 자식으로서 이보다 더한 응원이 또 있을까? 그 사위와 장모가 정겹게 당구 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러다가 당구가 모든 장모들의 로망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나도 응원한다, 당구장에 행복해하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