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Me Quick, 자스민

아름다운 퇴장을 배우다

by 인생여행


따스한 봄기운에 홀리듯 꽃시장에 들렀다.


남서향의 큰 창을 가진 우리 집 베란다, 오후가 되면 강한 햇볕으로 달궈지는 까닭에 줄기가 약한 초본식물(草本植物)은 자라기가 쉽지 않다. 한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에 화분 흙이 쉬이 말라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키만 커져 웃자란 식물은 힘없이 주저앉기 일쑤이다.


그래서 줄기가 튼튼한 관목(灌木)류의 다년생을 물색하던 중 향기가 일품인 자스민과 만리향을 점찍어 데려왔다.


당초에는 만리향이 아닌 천리향을 데려오려 했으나, 매장 진열대에 남아 있는 천리향 화분들의 수형이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잘생긴 놈들은 벌써 다 입양되고 허접한 녀석들만 몇 개 남아 있다. 이렇게 대놓고 외모 차별을 해도 되나? 미안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잘생긴 만리향을 주워 들었다.


데리고 온 자스민의 정확한 이름은 '브룬펠시아자스민(brunfelsia jasmine)'이라 한다.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으나, 볼록한 꽃봉오리들을 보니 며칠 후면 활짝 필 것 같다.


3일이 지나니 기특하게도 한 개의 꽃봉오리 끝이 터지며 보라색으로 물든 꽃망울이 보인다.


4일째, 길쭉해진 꽃망울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궁금한 듯 조심스레 세상을 내다본다. 마치 둥지에서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하루 더 자고 나니 보라색 봉오리들이 여기저기서 경쟁하듯 톡톡 터져 나온다.


6일째 되는 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와 베란다를 둘러보니, 오! 첫 번째 꽃이 활짝 피었다.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두운 베란다에서 성급하게 축하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꽃잎에 코를 대고 진한 향기를 실컷 맡아본다.


7일째, 꽃송이 가득한 베란다에는 자스민의 진한 향기가 너울거린다. 열린 문을 넘어 거실에까지 향기가 전해진다. 향기의 여왕 자스민이 봄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을 맞은 봄날의 정원, 우리 집 베란다가 활짝 웃고 있다.


그래, 이런 맛이야.

베란다에서 꽃을 키우는 재미!​


자스민의 원산지는 아라비아반도이다. 영화 알라딘에 나오는 아라비아 공주의 이름이 자스민인 이유이다. 자스민꽃의 향기를 안다면 영화 속 자스민 공주의 키스가 얼마나 달콤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룬펠시아자스민의 꽃말이 속삭인다.


아름다운 여인/당신은 나의 것/Kiss Me Quick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피었던 꽃잎은 점차 흰색으로 바뀌어 가며 갓 피어난 보라색 꽃잎에게 화려함을 양보한다. 대신 은은하면서도 고고한 흰색의 겸손함으로 빛난다. 그러기에 이 꽃은 영어로 'Yesterday today & tomorrow'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처럼 한 가지에서 피어난 꽃들이 신구의 조화를 이루며 끝까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자스민은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네 인생도 젊은 시절엔 화려하게 치장하고 세상을 다 가질 듯 질주를 한다. 보라색 꿈을 향한 도전을 하며 세상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 나이가 들수록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 물러나 젊은이들의 보라색을 돋보이게 할 흰색의 배경이 되어 간다. 이제 주인공이기보다는 조연으로 물러나 젊은이들의 비상을 응원하는 것이 순리이겠지.



말을 줄여라/가르치려 하지 마라/욕심부리지 마라



봄볕 가득한 베란다 정원에서 자스민으로부터 배운다. 보라색 꽃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며 조용히 퇴장하는 흰색 꽃의 미덕과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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