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첫 번째 수요일이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전철역으로 향한다. 집결지인 화랑대역까지 가려면 2시간이 소요된다. 오늘만큼은 차를 버리고 마음 편히 술 한잔 하는 날이니 들뜬 마음으로 총총걸음을 한다.
매월 첫 번째 수요일은 일수회(一水會) 모임이 있는 날이다. 은퇴한 사람들이기에 혼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에 모여 맘껏 놀아보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다. 연식이 좀 된 사람들의 모임에는 이런 식의 모임 이름이 유행한다. 매월 두 번째 금요일에 만나면 이금회(二金會)가 되고, 매주 화요일에 만나면 매화회(每火會)가 된다. 감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조립식 이름 짓기는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시대에 뒤처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뇌세포가 더 줄기 전에 빨리 의식 개혁을 해야 될 텐데.
모임을 만들기는 쉬우나 이탈 없이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쉽지는 않다. 모임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려면 구성원들의 추구하는 목적의식이 비슷해야 한다. 일곱 명의 단출한 인원의 구성원들은 대학교 같은 과의 선후배들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45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다. 어느덧 모두 은퇴하였으니 여유로운 시간이 많다. 그렇다고 무조건 만나는 것만으로 모임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구성원들을 묶어 놓을 공통 관심사를 이끌어내야 한다.
고심 끝에 모임의 일과를 정하였다. 일단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너무 자주 만나도 안되고 보고 싶어서 좀이 쑤실 만큼의 간격이 필요하다. 만남의 첫 일정은 가벼운 산책 정도의 산행으로 시작한다. 하산하여 주위의 맛집을 찾아 점심을 즐기는 것 또한 낙이다. 다음에는 당구장으로 이동하여 오후 내내 리그전으로 당구 게임에 몰두한다. 승패는 가리되 흔히 하는 돈내기는 없다. 그리고는 저녁과 함께 술잔을 곁들이며 그동안 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풀어놓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위로도 하고 욕지거리도 하면서 마음속에 박힌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하루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보냄 없이 온전히 쏟아부어 모임을 완성한다. 이것이 우리들 모임의 정해진 루틴이다.
대부분 수도권에 살지만, 멀리서 오는 친구들도 있다. 천안과 금산에서도 달려와 모임에 참석한다. 때로는 모임 장소를 그곳 지방에서 하기도 하면서 더욱 모임의 단결력을 공고하게 다진다.
오늘의 산행 코스는 태릉과 공릉의 뒷산 격인 공릉산의 '백세산책길'이다.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서울둘레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랑대역에서 출발하여 산길을 돌아 삼육대로 나오는 약 4km 코스이다. 나이가 백세인 사람도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공릉산백세문(孔陵山百歲門)'이라는 간판이 걸린 대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유월의 햇볕을 차단하니 산책하기에는 그만이다.
공릉산백세문3km 정도 올라가니 불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삼육대로 내려가는 불암산갈림길에 이른다. 더 오르면 철쭉동산이 있으니 봄에 오면 꽃구경을 할 수 있다. 길가에 불암산의 전설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본래 불암산은 금강산에 있었으나, 한양의 남산이 되고자 오던 중 한양에 남산이 이미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머물러 불암산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이야기는 울산에 있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다가 설악산 근처에 자리 잡고 울산바위가 되었다는 전설과 유사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잠시 웃고 가는 재미를 선사한다.
갈림길에서 내려가는 길은 삼육대 캠퍼스로 이어진다. 산 아래에 '제명호'라는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뜻밖의 호수 풍경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간다. 호수 주변에서는 야외수업을 나온 꼬맹이 유치원생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어우러진다.
캠퍼스를 벗어나 식당 '다람이임자탕'에 당도했다. 식당의 주 메뉴는 도토리묵에 강원도산 들깨인 임자를 넣어 만든 '임자탕'이다. 백세길을 걸으며 길게 살 의지를 다지고 건강식까지 더하니 얼마나 더 오래 살려고 하는지. 사람들의 수명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일까? "백세에 저세상에서 데리러 오거든 극락왕생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라는 '백세인생'의 노랫말처럼 백세 수명도 만족할 수 없나 보다.
우리 회원들 대부분이 고령의 부모님들의 병수발을 들었었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90세 전후의 부모님들은 치매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하여 자식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요양원 등에 모시기도 하지만 그것도 못 할 짓이다. 벌써 10년째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R형은 어머님의 하루 종일 이어지는 치매성 반복 질문에 답하느라 지쳤는데 오늘 만남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는 인사말을 SNS에 문자로 올렸다. 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님을 한 달 전에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회장님의 취기 어린 모임 촌평은, 오늘 하루 행복한 삶의 한 조각을 보냈음을 대변하고 있다. 모두의 글에 즐거움과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니 더없이 만족한 하루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지금 백세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는 인생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목적지까지 몇 명이 완주할지는 모르겠으나, 모두가 아무 탈 없이 목적지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여행 중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이가 백세까지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오히려 두려워지기도 한다.
오늘 '백세산책길'로의 산행이 오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살게 할 밑거름이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