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그림자 지우기

칭찬과 비난 사이

by 인생여행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


명절(名節)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절인 설과 추석을 맞이할 때면 우리는 으레 이런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즐거운 명절을 보내세요.’

예전에는 손수 정성껏 그린 그림에 감사의 인사말을 적어 넣은 연하장을 우편으로 부치는 수고로움을 해야만 했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온라인 공간에 다양한 카드들이 진열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한 번의 손놀림으로 많은 지인들에게 인사말을 보낸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사말 중 누군가에게서 오는 것은 반갑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서 오는 것은 귀찮은 스팸으로 취급받는다.

주고받는 인사말처럼 명절에는 모두가 즐겁게 보내고 싶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게 놀고, 행복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충분히 즐거운 명절을 지내고 있는가?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니 명절은 늘 즐거웠다. 명절에는 어머니가 사주신 새 옷을 입을 수 있었고, 평소에는 먹지 못하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에 당연히 즐거웠다. 마을을 돌며 세배를 하면 어른들은 세뱃돈을 주거나 한과등을 내어주기도 했다. 가족은 물론 마을의 이웃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명절이었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아이들의 명절은 사전적 의미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즐거운 날이었다.

결혼 후 맞게 되던 명절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빠른 경제 성장과 맞물려 핵가족이 일반화되면서 명절은 이산가족 상봉의 날이 되었다. 하루하루 직장살이에 바쁜 산업전사들은 마음 놓고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는 명절 연휴가 기뻤다. 명절이 되면 자식들은 부모님께 드릴 용돈과 선물을 챙기느라 마음의 부담을 지고,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를 종일 달리느라 지치면서도 부모님을 뵐 수 있다는 즐거움에 고향으로 달려갔다.

차례를 지낼 음식을 만드느라 여자들은 부엌에서 고된 시간을 보낸다. 남자들은 일손 부족으로 남겨진 밭일을 마무리하고, 손보지 못해 망가진 물건이나 집을 고치고, 또 훌쩍 자라 보기 흉한 울타리를 깎느라 밖에서 바쁘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오랜만에 자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께 효도를 다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즐거워한다. 명절 연휴는 그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명절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니 그림자는 늘 그곳에 있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¹⁾였다. 열광하는 농구장의 관객들에게는 선수들의 현란한 드리블만 보일 뿐 그 옆을 지나가는 고릴라는 보지 못하는 현상이다.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게 되는 심리적 착시 현상을 일컫는다. 하지만 농구장의 열기가 식어가면 관객에게 그 주변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업화의 피로가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하나둘 보이지 않던 고릴라를 보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을 지내고 오는 부부들은 차 안에서 다투고 있었다. 차례상과 가족들의 음식 준비에 지친 며느리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명절에 시부모는 찾아뵙는데 왜 친정 부모는 찾아뵙지 못하는지 따져 묻기도 하였다.

남편들은 아내들의 고충과 억울함을 이해한다. 그러나 부모님들에게 명절을 간소화하게 지내고, 명절날 아내 부모님을 뵈러 일찍 떠난다고 선뜻 말을 꺼내지도 못한다. 조상숭배,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평생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들을 설득한다는 것 자체가 불효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생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지고 살아왔던 나와 같은 남자들과 줄곧 직장인으로 살아온 아내와 같은 여자들에게는 불만은 더 쌓여가고 해결의 길을 모색하기란 버겁기만 하다.

소위 베이비붐세대로 불리는 우리 또래는 이제 그림자를 분명하게 보고 있다. 명절이 즐거우면서도 마음은 무겁다. 아내한테는 면목이 없지만, 우리가 집안의 어른이 될 때까지는 지고 가야 할 짐으로 받아들인다. 아내도 남편의 고뇌를 알고 있으니, 불평하면서도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려니 한다. 전통이라는 크나큰 명분에 대항할 때 직면하게 될 주위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나의 설은 며느리를 얻고 처음 맞는 명절인지라 의미가 남다르다. 아들과 며느리는 요즘 MZ세대로 불리는 세대이다. 아날로그 세상의 감성보다는 디지털 세상의 이성에 익숙하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한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 부모들과 함께 하던 명절날의 그림자를 보며 살아왔기에, 양성평등과 양가평등을 놓고 지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명절의 그림자를 지우려면 우리 세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신 나는 차례의 간소화를 넘어서 차례상을 차리지 않기로 하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차례상을 빼고 살아있는 우리만의 식사를 준비한다는 죄스러운 마음은 여전하지만, 이제 오랜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차례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어려움과 가부장적 가족 관계의 구심점인 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 형제와 친척들로부터는 조상과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불효자로, 사회적으로는 전통을 파괴하는 반사회적 존재로 비쳐질 수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은 불편하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걸맞지 않은 전통이라면, 타협하는 열린 마음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언론에서 '명절증후군'이라는 말로 분위기를 조성해 주니 조금이나마 부담이 덜어진다.


아내는 마음에 걸리는지 이번 설에도 으레 부치던 전과 잡채라도 준비한다고 고집한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 내외가 먼 거리를 달려와 일을 거드는 수고로움을 알기에, 우리 부부는 함께 전을 부치며 음식 준비를 미리 한다. 그동안 힘들면서도 명절의 그림자를 못 본 체하던 우리는 이제 자식 세대에게 그림자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또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자식들이 즐거울 수 있다면 우리도 즐거운 것이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MZ세대들도 명절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힘쓰고 있다. 그들도 부모들의 즐거운 명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집에 하루 묵고 또 며느리의 부모를 뵈러 바쁜 걸음을 옮긴다. 그들이 처음으로 상대방 부모 집에서 맞는 낯선 환경에 긴장하며 명절을 보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온 가족이 모여 화투 놀이로 분위기를 띄우며 왁자지껄 떠들어보기도 한다. 격식보다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필요하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당연시되던 것이 이제 산업사회에서는 물음표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 것일까? 씨족사회인 이웃들과 둘러싸여 3대가 한 집에 모여 살던 대가족의 농경사회는 명절이라고 해서 가족들의 모임이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돌아가신 조상님들은 돌아올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명절을 맞아 함께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핵가족화된 산업사회는 다르다. 저승이 아닌 이승에 함께 있는 가족들끼리도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식사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조상님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부모, 형제, 자식들이 모여 맘껏 즐길 수 있는 명절이 되어야 하겠다.


누구는 나의 결정을 칭찬하겠지만, 또 다른 누구는 비난할 것을 안다. 칭찬을 앞세우고 비난은 등에 지고 가리라.


취업정보 사이트 '인크루트'가 최근 조사한 명절의 스트레스 요인에는 차례상 차리기 이외에도 부담스러운 명절비용, 자유시간의 제약, 가족 간 의견 다툼, 잔소리 등이 등장한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명절의 그림자'들이다. 새로운 사회의 시스템과 가치관에 따라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대처하고 양보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명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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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ristopher Chabris & Daniel Simons, “The Invisible Gor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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