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이미 충분히 청렴하다!
가끔 업무 이메일을 보면 첨부된 안건에 대한 예를 들어 적극행정 또는 조직문화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한다는 직원의 의견을 묻는 내용이 올라온다.
우리 부서 직원이 약 8천여 명이 넘으니 십시일반 직원의 의견을 구하면 이 중에서 좋은 의견이 나올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메일을 보내리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 거기서 거기인데다가 나처럼 앞에서 나서기 극히(?) 꺼려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의견을 내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작년 이맘 때 우리센터에서는 '청렴'이란 주제로 표어를 공모했었고, 센터에서 직원의 청렴도를 높이는
방안에 대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당시 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2가지 모두 내 의견을 적어 보냈는데, 내 행동은 주인의식의 발로 외에도
제법 괜찮은 포상이 걸려져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2가지 모두 채택이 되지 않았는데 난 내
내공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뒤늦게 터졌다. 모 청렴 워크숍에서 한 높으신 분의 30분 남짓 강의가 있었다.
내용은 참 좋았는데 중간에 그분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내 얼굴이 붉어졌다.
강의 내용은 대충 이랬었다.
"저번에 제가 직원 청렴도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를 했었습니다. 여러 의견을 주셨는데 그중 어떤 분은
배지를 달면 어떠냐는 말도 있었는데, 요즘 시대에 배지가 뭡니까? 8,90년대도 아니고......"
강의실 중간에 앉아 있던 나는 혹시라도 나를 알아볼까봐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말을 한 장본인이
이 자리에 없으리라 생각하겠지만 난 부끄러움에 금새 달아오른 얼굴색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내가 청렴도 향상을 위해 배지를 단 이유는 메일을 보낼 때 그 취지를 말하긴 했었다.
공무원증을 패용했을 때 자신의 몸가짐과 행동이 달라지듯이, 청렴도 배지를 달면 직원들은 출퇴근할 때 청렴배지의 의미를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청렴을 되새길 수 있다는 점과 어쩌다 한두 번의 교육보다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시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 없이 난 8,90년대 고리타분한 직원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아마도 그분은 요즘 MZ세대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대한 모양인데... 그리고 특별히 나를 저격하기보다는
강의를 하다가 툭 튀어나온 것이라 애써 위안을 삼았다.
그 이후 나는 그 어떤 아이디어 의견을 묻는 메일이 오면 쓱 한 번 읽어보고 휴지통에 살며시 넣는다.
내 가치는 누구와 비교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해서 내가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