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에 나왔으니 이 글을 쓰는 2023년 기준 69년 된 앨범이다. 1954년부터 2023년 사이, 그 사이 인류는 충분히 많은 일을 겪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규모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전혀 예상치 못한 빈도로 겪으며 사회와 문화는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로 거듭났다. 한 예만 들면 이렇다. 1968년작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에서 “미래에는 이런 것이 등장할 것이다.” 라며 묘사한 슬레이트 컴퓨터를 오늘날 사람들은 태블릿, 혹은 스마트폰이라 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으며, 제조사들은 내가 원조니 저게 원조니 하는 법정공방 중 참고자료로 1968년에 나온 영화를 제출한다. 이 앨범은 그 영화보다 14년 전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여전히 인기 있다. 그 시절의 젊은이와 오늘날의 젊은이 모두 이 앨범을 즐긴다. 그 시절 선셋대로의 어느 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 선대를 먹던 젊은이도, 오늘날 을지로의 어느 술집에서 소주맥주를 마시는 젊은이도 이 앨범을 알고 이 앨범을 듣는다. 세상이 다 바뀌었거늘 이 앨범의 가치는 여전하다. 작년은 물론 지난 달 음악도 안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70년 가까이 된 앨범은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내게 이 앨범의 인기는 늘 미스터리다. 가끔씩 궁금해 다시 들으면 왜 지지를 받는지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까지 인기가 좋을 것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시 생각하니 나는 영원히 이 앨범의 인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앨범은 여전히 젊으며 젊은이의 정서를 관통하며 공명하는데, 나는 어느덧 젊지 못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그저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그 공감대를 알진 못하겠단 생각을 한다.
쳇 베이커는 일단 트럼펫 연주자이긴 한데 노래도 종종 불렀다. 노래까지 악기로 쓰며 만든 앨범이 몇 있는데 그것들 중 노래하는 쳇 베이커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앨범이자 전기 쳇 베이커의 캐릭터를 가장 잘 묘사한 앨범이 이것이다. 이 앨범에서 쳇 베이커는 젊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고 선선하게 사랑을 노래한다. 잘 생겼고 아직 상하지 않은 얼굴로 슬금슬금 웃으며 말이다. 열정, 화려함, 한, 슬픔 같은 그간 재즈의 문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래하는 젊은이에게 당대 젊은이들은 환호했고, 이는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하고 사적인 정서가 아니기에 확실히 다가서기 쉽고 확실히 공감하기 쉽다. 난 이게 이 앨범의 가장 큰 인기요인이라 ‘유추’한다. 나는 어느덧 늙었고 어느덧 재즈를 너무 좋아하여 이 정서에 깊이 공감치 못하지만 언젠가는 느꼈던 것 같은 감정이며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정서다.
신기한 건 트럼펫과 노래 둘 다 잘 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수준이란 점이다. 쳇 베이커가 잘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짐 홀(Jim Hall)의 ‘콘시에르토(Concierto)’ 앨범에서의 트럼펫이나, 1986년에 나온 ‘싱즈 어게인(Sings Again)’ 앨범에서 노래할 때와 같다. 이 앨범에서 쳇 베이커의 트럼펫과 노래는 모두 그의 최고 기량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다만, 앨범의 무드와 잘 어울리며 스윙해야 할 때나 발라드해야 할 때나 노래에 잘 묻는다. 사실 사람들(나를 포함한)은 대단히 빼어난 기량, 혹은 자아로 꽉 찬 연주보다 곡에 적절히 잘 어울리며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아 적당한 연주를 선호한다. 결국 듣는 것은 곡이며 결국 듣는 것은 앨범이기 때문이다. 쳇 베이커는 이 앨범에서 잘 어울리는 트럼펫과 노래로 듣기 좋은 곡들을 이끌어간다. 사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결국 아무것도 모르면서 생각만 했다. 지나갔고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을 상상하며 말이다. 그가 웃으며 노래하던 1950년대, 그가 쓸쓸히 죽은 1980년대, 내가 젊었고 이제는 흐릿한 2000년대, 그리고 내가 없는 2020년대.
엘피 이야기
퍼스트는 두 가지 판형으로 나왔는데 10인치 33rpm 한 장 버전, 그리고 7인치 45rpm 두 장 버전이다. 둘 다 오늘날엔 멀쩡한(들을만한) 물건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저 유명한 삼색 커버는 1956년에 나온 12인치 LP 리이슈부터 쓰였다. 가장 인기가 좋은 에디션은 2020년에 블루노트(Blue Note)에서 나온 리마스터링 리이슈다. 원저작권을 가진 회사 퍼시픽(Pacific Jazz)을 캐피톨(Capitol Music Group)이, 그 캐피톨과 블루노트를 유니버셜(Universal Music Group)이 가졌고 퍼시픽 앨범들의 바이닐 제조유통권을 블루노트가 가지고 있기에 블루노트에서 나왔다. 바이닐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이 에디션의 프로듀서와 래커(복제기준본)를 담당했으니 조 할리(Joe Harley)와 케빈 그레이(Kevin Gray)가 그 둘이다. 덕분에 말끔한 음질을 갖췄고 덕분에 인기와 프리미엄이 굉장하다.
70년 가까이 된 앨범이다보니 스페인 등 일부국가에서 저작권이 만료되어 몇 제조사에서 무인가 버전이 나온다. 그것들 중 여럿이 우리나라에도 유통되고 있는데 그런 건 사면 안 된다. 저작권 같은 숭고한 가치를 논할 것도 없이, 인가를 받지 않았으니 유니버셜뮤직이 보유한 마스터 테이프를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결국 다른 엘피나 디지털 음원에서 소리를 가져와 제조했을 것이기에 음질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음반을 사는 것보단 그냥 스트리밍 등 쉽고 저렴한 디지털로 들으면 된다. 무드는 없겠지만.
같이 들어볼만한 앨범들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의 1989년작 ‘고요(Silence)’: 쳇 베이커의 마지막 참여작으로 생전에 녹음해 사후에 나왔다. 훌륭한 지휘자와 함께 할 때 쳇 베이커의 기량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짐 홀의 1975년작 ‘콘시에르토(Concierto)’: 쳇 베이커가 참여했단 의미도 있지만 앨범 자체가 너무 뛰어나다.
쳇 베이커의 1986년작 ‘싱즈 어게인(Sings Again)’: 그가 노래한 앨범들 중 가장 쓸쓸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쳇 베이커와 아트 페퍼(Art Pepper)의 1957년작 ‘플레이보이스(Playboys)’: 두 젊은이의 빠르고 역동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두 사람의 이후 인생에 얼마나 굴곡이 많았는지를 생각하며 들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젊은이의 연주는 사뭇 흥미진진하다. 1961년부터는 ‘픽쳐 오브 히스(Picture Of Heath)’란 이름으로 리패키징 되어 나왔고 가장 최근의 리이슈도 그 이름으로 나왔으니 그것을 구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