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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수 Feb 06. 2023

이 가볍고 무르며 부드러운 공기를 움켜 쥐고

퇴근했으니 재즈 엘피 002

제리 멀리건의 ‘야경’

Gerry Mulligan – Night Lights

2021년 뉴랜드 리이슈 M/M 기준


A면

Night Lights

Morning Of The Carnival From ‘Black Orpheus’

In The Wee Small Hours Of The Morning

 

B면

Prelude In E Minor

Festive Minor

Tell Me When

Night Lights (1965 Version, Edition Exclusive)


앨범 이야기

오늘날 이 앨범은 각별한 이유로 인기가 있는데 바로 커버가 예쁘단 점 때문이다. 놀라웁게도 진짜 그렇다. 이 앨범을 알며 이 앨범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 명 중 여덟아홉 명은 커버의 밤 풍경 그림이 예뻐 관심이 생겼고 좋아한다고 말한다. 6인치 언저리의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보는 이 시절에 커버가 예뻐 인기를 얻는 앨범이 있다니, 내겐 이것만 해도 충분히 놀랍거늘 커버 예쁜 덕은 놀라운 현상 하나를 더 만들었더라. 바로 커버 그림의 색이 퍼스트보다 진하게 나온 일본 리이슈들의 인기가 더 많은 수요동향이다. 그에 맞물려 내가 가진 2021년 리이슈는 제법 오래간만에 나온 리이슈임에도 불구하고 퍼스트와 비슷한 색감의 커버 덕에 인기가 덜했고, 제조사는 리프레스 에디션의 커버는 일본 리이슈들처럼 색을 진하게 넣었다고 한다. 이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면 놀랍고 재미있다. 내가 전혀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많구나. 그리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쏠쏠한 앨범 하나가 다시 복기되는구나.


내게 제리 멀리건은 ‘계산된 유유자적의 달인’이다. 달리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는다. 그 언젠가 제리 멀리건과 폴 데스먼드(Paul Desmond)의 1957년작 듀엣 앨범 ‘블루스 인 타임(Blues In Time)’을 들으며 정말 굉장하단 생각을 했다. 자랑하려는 욕구가 없는 사람 둘을 붙여 놓으니 이런 게 나오는구나. 자랑하려는 욕구는 없는데 잘 하는 사람 둘을 붙여 놓으니 이런 게 나오는구나. 둘 다 젊었을 때 녹음한 앨범이다보니 젊고 유망한 연주자들의 특성 상 스스로가 가진 재능을 자랑하려는 욕구가 연주에 드러날 법도 한데, 둘은 서로 나서지 않으며 흐름을 읽고 서로와 연주자들과 곡과 앨범의 흐름에 맞췄다. 그 화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둘의 단단한 실력이 드러났고, 앨범은 풍성하고 우아한 음악을 이어갔다. 하드밥임에도 불구하고 임프로바이제이션보단 인터플레이의 즐거움이 앞섰고, “하드밥인 동시에 쿨인 앨범은 이런 것이구나.” 란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제리 멀리건에 관심이 생겼고 이런 저런 앨범들을 듣다보니 결론이 섰다. 이 사람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사람이고 해도 되는데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구나.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구나.


발라드 잘 하는 연주자들 중에 제리 멀리건 같은 사람이 종종 있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연주를 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이 화려한 연주가 아닌 은근한 무드를 원한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린 사람이다. 제리 멀리건이 그런 사람이다. 밤 풍경 뒤에 숨어 일 년에 365번이나 반복되는 풍경을 다시는 없을 순간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 속내에는 존재와 역할을 따지는 계산이 있고 큰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으며 듣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소진되지 않고 늘 어딘가에 남아있는 게 중요하단 판단이 있다.


그렇게 그는 롱런했다. 첫 리드 앨범을 1951년에 나온 EP라고 하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1995년에 나왔으니 대충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작곡과 공연과 연주와 녹음을 했다. 그 사이 거쳐간 레이블들 중 유명한 곳만 뽑아도 프레스티지(Prestige), 퍼시픽(Pacific Jazz), 리버사이드(Riverside), 버브(Verve), 콜럼비아(Columbia), RCA빅터(RCA Victor), CTI, 머큐리 엠알씨(EmArcy), 콩코드(Concord), 라임라이트(Limelight), 텔락(Telarc), GNP, 그리고 이 앨범이 나온 필립스(Philips) 등 쟁쟁하다. 실상 블루노트를 제외하면 재즈 명가는 다 거쳐갔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인생에 곡절은 많았지만 음악은 포기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쉬어가는 때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느슨하고 여유 있게 색소폰을 불었다.


이 앨범에서 다재다능한 제리 멀리건은 바리톤 색소폰과 피아노를 맡았고, 역시 다재다능한 아트 파머(Art Farmer)가 트럼펫과 플루겔혼을 맡았다. 트롬본은 밥 브룩마이어(Bob Brookmeyer)가, 베이스는 빌 크로우(Bill Crow)가, 드럼은 베이브 베일리(Dave Bailey)가, 기타는 참여만 했다하면 어떤 앨범이든 본인의 앨범으로 만드는 짐 홀(Jim Hall)이 맡았다. 웨스트코스트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캄보 구성원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떤 느낌일지 유추할 수 있을 터이며, 동시에 가슴이 뛸 것이다. 아니다. 이미 들어봤을 터이니 가슴이 뛰진 않겠다.


뭐, 이렇든 저렇든 이 앨범은 커버 그림이 예뻐 인기가 있다. 뭐, 이렇든 저렇든 인기가 있든 말든 내게 이 앨범은 훌륭한 곡들이 담긴 아름다운 앨범이다. 앨범은 역시 음악이 좋아야 하고 엘피 역시 음악이 좋아야 진열장에 남겨 둘만 하다.


엘피 이야기

현존하는 1963년 US 퍼스트 에디션들의 제조처가 몇 곳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그리 인기가 있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퍼스트부터 모노와 스테레오로 나눠져 나온 앨범이니 취향에 맞게 고르면 된다. 내 추천은 스테레오다. 스테레오 믹싱을 화려하게 쓴 건 아니지만 악기 포지션이 있는 녹음이니 그 맛을 얻고 깊이를 내주는 편이 좋겠다.


이후에도 수수한 인기(인기가 없단 게 아니다)를 구가하며 몇 년에 한 번씩 리이슈들이 나오곤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장 인기가 좋은 에디션은 커버 그림 색이 진한 일본 리이슈들이다. 인기가 있지만 프리미엄이 몰인정할 정도로 심각하진 않으니 그것들을 노려보는 것도 좋겠다.


영국의 소규모 제작사 ‘뉴랜드(New Land)’는 이 앨범이 인기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2021년에 리이슈를 냈다. 소리를 신뢰할 수 있는 에디션이니 래커(복제기준본) 제작을 케빈 그레이(Kein Gray)의 회사 코히어런스(Cohearent Audio)가, 프레싱을 독일 팔라스(Schallplattenfabrik Pallas GmbH)가 했다. 바이닐 애호가들에겐 셋 다 신뢰의 상징이며, 내가 듣기에도 소리는 말끔하니 좋다. 인기 있는 앨범의 오래간만에 나온 리이슈지만 제법 많은 양을 제조했기에 2023년 기준 별 프리미엄은 안 붙었다. 듣고 싶으면 이걸 사면 된다.


같이 들어볼만한 앨범들

제리 멀리건과 폴 데스먼드의 ‘블루스 인 타임’, 그리고 1962년작 ‘둘의 생각(Two Of A Mind)’: 하드밥인 동시에 쿨인 굉장한 앨범들이다. 잘 하는데 자랑하긴 싫어하는 사람 둘이 붙으면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1957년작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앨범이니 말 그대로 ‘쿨 재즈’를 정립한 앨범이다. 그간 단편적이자 인상적으로 존재하던 쿨을 개념으로 만든 앨범이며, 엄청난 연주자들이 들어차 각자의 역할을 정확하게 나눠 다룬다. 길 에반스(Gil Evans)의 철두철미함이 빛을 발하며, 제리 멀리건은 해야 할 역할을 하며 길 에반스의 지휘를 따른다.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와 제리 멀리건의 1957년작 ‘몽크와 만난 멀리건(Mulligan Meets Monk)’: 진짜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사람이 만난 앨범이라 재미있다. 둘도 없이 개성 강한 몽크와 남 제쳐두고 뛰는 사람 싫어할 것 같은 제리 멀리건이 만나 기묘한 화음을 이룬다. 듣다보면 서로 배려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몽크는 개성을 좀 누그러뜨리려고 하며, 멀리건은 어떻게든 맞춰주려고 한다.


제리 멀리건의 1983년작 ‘리틀 빅 혼(Little Big Horn)’: 후기 제리 멀리건(사실 이로부터도 10년 넘게 더 활동했다.)의 연주와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유유자적하며 힘은 더 뺐는데, 그 촉은 섬세하다못해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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