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피가 무거우면 뭐가 좋나요?
왜 엘피를 듣나요 01
아날로그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한 생각들을 적는 시리즈입니다. 그렇다고 종이에 써 옮긴 건 아니고 아이패드로 썼습니다. 아이패드만 써 쓰다보니 상당히 대충 쓴 감이 있습니다. 대충 즐겨주세요.
엘피들 중에는 180g이네 200g이네 하며 소위 ‘중량반’인 것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뭐가 좋은지 안 알려주는 경우가 대다수더라고요. 그래서 온갖 유추가 떠돌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튼튼하네, 안 깨지네 같은 것도 있는데 PVC 엘피를 던져 깰 수 있을 정도의 완력을 가지고 있다면 깨진 엘피의 아쉬움을 상쇄할 만큼 스스로의 완력에 뿌듯해 해도 됩니다. 힘 줘 구부리면 깨지긴 하는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면 웬만한 생활용품은 다 부서집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무거운 엘피가 좋은 이유는 딱 둘 뿐이며 그 둘 마저도 확정이 아닌 가능성에 그칩니다.
1. 소리골을 더 깊게 새길 수 있다. 그래서 더 넓고 더 분명한 소리를 ‘담을 수‘ 있다.
2. 덜 휜다. 안 휘는 건 아니고 덜 휜다. 빈도와 강도 모두.
‘소리골을 더 깊게 새길 수 있다’부터 살펴볼게요. 중량반이란 건 같은 넓이의(엘피의 지름은 12인치로 정해져 있으니) 원판을 만드는데 더 많은 재료를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넓이와 밀도는 한계가 있으니 두께가 늘어나겠죠. 보통 110g 정도를 쓰는데 180g을 썼다면 70g 만큼 더 두꺼워진 겁니다. 두께가 두꺼워졌으니 소리골(Groove, 소리의 정보를 담은 골자기 모양)도 깊게 팔 수 있겠죠.
턴테이블 오디오 시스템에서 소리 신호는 카트리지 끝에 달린 바늘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로 인해 정의되고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바늘은 엘피의 소리골을 따라 움직입니다. 바늘은 소리골의 깊이와 모양을 따라 분 당 33바퀴나 45바퀴를 나아가며 양이 변화하는 전기를 만들고, 전기는 신호가 되어 앰프 같은 오디오 시스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소리골이 깊으면 그것을 따라가는 바늘 역시 더 크게 움직이고, 전류량의 변화폭이 커지며, 정의하여 만들 수 있는 소리의 폭이 넓어지는 동시에 세밀해집니다. 골이 깊어졌으니 바늘이 더 깊게 들어가며 더 깊은 저음을 정의할 수 있고 해당 음역대에 더 넓은 골 깊이를 쓰기에 보다 정확한 길, 보다 정확한 중고음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엘피가 두꺼워 소리골이 깊으면 더 좋은 소리를 담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량반=소리가 좋다.‘가 아니란 겁니다. 중량반은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토대일 뿐 좋은 소리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엘피는 결국 사람이 아날로그 공정으로 만듭니다. 제작자의 감과 선택을 바탕으로 분명하게 조절할 수 없는(=0과 1로 조절할 수 없는) 기계를 써 만듭니다. 그렇다보니 두꺼운데 얇게 판 엘피도 있고(스펙을 못 쓴) 깊게만 판 것도 있고(세밀한 정보가 없는) 애초에 팔 소리 정보 자체가 잘못되어 엄하게 판 것도 있고(스펙이 아까운) 잘 만든 것도(굿!) 있습니다. 중량반은 마치 곱셈에 들어가는 상수와 같습니다. 일반반이 1이라면 중량반은 2이긴 한데 엘피란 수식은 2 다음에 +가 아니라 x가 붙습니다. 그래서 =은 1이 될 수도 있고 2나 4가 될 수도 있으며 0.5나 2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뭐, 1보단 2가 좋긴 합니다.
여담으로 옛 엘피 중에는 ’딥 그루브(Deep Groove)’ 라 불리는 스펙을 가진 물건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 언저리까지 미국에서 나오던 물건인데 라벨 쪽에 쑥 들어간 링이 있어 그리 부릅니다. 오래된 엘피의 상징, 종종 퍼스트 에디션의 상징이라 스펙으로 취급하는데 이 딥 그루브가 있는 엘피는 중량반이기도 합니다. 두꺼워야 ‘딥‘ 그루브를 남길 수 있으니까요. 60년대 중반 이후 엘피가 점점 얇아지기도 했고(재료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스탬핑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며 딥 그루브 역시 점차 사라졌고, 딥 그루브는 특정 시절에 나온 물건임을 보증하는 스펙으로 남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엘피들의 음질 역시 전반적으로 열화되며(두께가 줄며 골 깊이도 줄었으니) 딥 그루브는 좋았던 시절의 음질 좋았던 물건(대개 퍼스트나 세컨드) 임을 보증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이제 덜 휘는 걸 살펴보죠. 중고반 많이 사본 분이나 산 적은 몇 번 없는데 재수가 없는 분이나 진짜 끝내주게 재수가 없어 새 것임에도 불량인 엘피를 경험하신 분은 알 겁니다. 휘어서 소리가 튀거나 심지어 다음으로 안 넘어가는 경우를 경험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속상하죠. 게다가 재생이 된다고 한들 역시 문제인데, 휘어 튀어나온 구간은 바늘을 누르는 압력이 커지는데 결국 순간적으로 침압이 커진 것과 같습니다. 침압이 커지면 바늘이 더 깊게 들어가거나 캔틸레버가 더 휘청이며 저역이 더 나옵니다. 결국 순간적이나마 대역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음악의 bpm이 33이나 45의 배수가 아닌 이상 불협하며 주기적으로 무너지는 음질이 등장하여 고통스러워 집니다. 무겁고 두꺼운 엘피는 이게 덜 합니다. 빈도와 강도 모두.
종이는 잘 휘청거립니다. 쇠파이프는 웬만해선 안 휩니다. 소재 강도의 문제도 있지만 두께의 영향도 있습니다. 두꺼우면 덜 휩니다. 엘피도 그렇습니다. 기울어져 보관되었거나 위에 무거운 게 올라가 있었거나 뜨듯한 곳 위에 오래 있었거나 애초에 불량이거나 우주의 기운을 많이 받은 엘피는 휩니다. PVC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얇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재료를 많이 써 무겁고 두꺼운 엘피는 그게 덜 합니다. 휠 가능성도 적고 휘어도 적게 휩니다. 튈 일도 음질이 무너질 일도 덜 합니다.
다만 이 역시 한계가 있으니 ‘안‘ 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세상에 아예 안 휘는 엘피는 정말 몇 없습니다. 아세테이트 래커나 증착가공한 마더 디스크나 스탬퍼 같은 걸 엘피라 치면 안 휘는 엘피가 있긴 있다만 그런 걸 듣는 사람은 엔지니어와 일부 엘피 환자 빼곤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소비하는 엘피는 다 휠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중량반이라고 해도 보관을 허투루 하면 휘고 처음부터 불량이라 휘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보관하다 휘었으면 슬프면 되고(피는 방법이 있긴 한데 리스키하거나 비쌉니다) 처음부터 휘어 나왔다면 교환하면 되는데, 안타깝게도 엘피 중에는 교환용 예비품도 없을 만큼 한정한 양으로 출시되는 게 많죠.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