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사진을 찍으며
93.
아내는 백일 사진을 찍어야 하는 건지 내게 물어옵니다.
나는 아내에게 사진관에 가지 말고 내가 직접 찍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비가 찍어주는 사진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아내는 내 말을 따라줍니다.
아내는 코디, 나는 사진사 역할을 합니다.
볕이 잘 드는 시간을 택해 아기를 앉히고 셔터를 누릅니다.
아기는 혼자 앉지도 못해 베개로 등을 받쳐야 합니다.
아내가 두건을 씌웠다가 벗기고, 옷을 갈아입힙니다.
우리는 이 아침의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워 신이 납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영아사망률이 세계 1위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제도 일곱이었는데, 셋이 죽고 넷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100일은 아기의 생사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점이었습니다.
100일을 넘기면 살아남는 거고, 100일을 넘기지 못하면.......
이제 세월이 흘러 100일의 생존이 옛날의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100일은 여전히 기쁜 날입니다.
어미와 함께 보낸 10개월을 견디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바야흐로 100번째 날을 맞이합니다.
94.
여기는 ‘아빠 스튜디오’입니다.
첫 손님은 우리의 아기입니다.
아기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카메라 앞에서 제법 늠름한 표정을 지어줍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아기를 바라보며 연방 셔터를 누릅니다.
사진을 프린트해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아내는 내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심 100일 사진을 사진관에서 더 멋지게 찍어주고 싶은 눈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야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아 뿌듯합니다.
95.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뚜루뚜뚜루뚜는 쿨쿨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며 회사일을 하느라,
지쳐 잠든 아내의 뺨에 나는 가볍게 입을 맞춥니다.
그러다가 불을 켜지 않은 침실에서 깜짝 놀랍니다.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뜹니다.
우리의 아기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라진 아기 대신,
아내 옆엔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소년이 누워 있습니다.
어깨가 막 자리를 잡아가는 소년의 골격에서는
언뜻 청년의 기운까지 느껴집니다.
내 귀엽고 앙증맞은 아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 녀석이 내 아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지?
어제 뚜루뚜뚜루뚜가 백일을 맞이한 것처럼 모든 게 생생한데
세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려
어느덧 아기는 소년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별안간 '뚜루뚜뚜루뚜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에 사로잡힙니다.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충동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이 소원은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되살아나 나를 물들입니다.
자꾸만 자라는 뚜루뚜뚜루뚜를 보노라면 어쩐지 아쉽습니다.
나는 그림형제의 동화 속 등장인물처럼 어리석은 소원을 비는 꼴입니다.
부모는 어떤 점에서는 명백히 탐욕스럽습니다.
나는 잠든 뚜루뚜뚜루뚜의 뺨에 얼굴을 대고,
아이의 숨소리를 한동안 듣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앞으로의 날들을 가만히 상상합니다.
백일이 천일이 되고,
천일은 또 더 큰 숫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이는 재크의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고,
우리는 고유한 단독자가 되어 일대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 대 인간으로.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96.
오랜만에 방 정리를 하다가 뚜루뚜뚜루뚜가 태어나고 처음 만들었던 앨범을 발견합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질러진 방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아기의 사진들을 들춰봅니다.
앨범들이 한 장씩 넘어갑니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신혼집에서 백일 사진을 찍으려 준비하던 우리가 자연스레 연상됩니다.
이제 막 초보 부모가 된 아내와 나는 100일의 아침이 밝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 아침에 느껴지던 은근히 의도된 분주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아내는 아기에게 입힐 옷을 준비하고,
나는 카메라의 화이트 밸런스를 맞춥니다.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그 순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사진관에 갔다면 더 좋은 사진을 건졌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아기자기한 추억은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진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나는 어쩐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두 아들을 가진 한 남자가
소년이 된 아기들의 사진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그 남자의 이야기 속에는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지도 않고,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빛나는 영광과, 환상적인 사랑도 없습니다.
반전이라고 말할 터닝포인트도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구질구질한 슬픔과,
그 슬픔을 견뎌내려는 안간힘 같은 것만 여기저기에서 발견됩니다.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모자라고 덜 떨어진 짓들을 기어코 하고선 끝끝내 후회하고야 맙니다.
인생을 단번에 요약할 만한 어떤 대사도,
거창한 상징도,
완전한 해결을 의미하는 결말 같은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에서 조용히 벌어집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진심은 그저 짧은 순간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아기의 사진을 찍었던 그날 아침처럼.
97.
사진이 포착한 저 너머의 순간들을 돌아보고 있는데,
뚜루뚜뚜루뚜가 다가와 내게 놀아달라고 말을 겁니다.
"니네, 이 아기가 누군지 알아?"
나는 앨범 속에서 웃고 있는 아기를 가리킵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게 형일지, 동생일지를 가늠합니다.
나는 두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한 어미의 몸에서 난 두 아이는 땅콩의 반쪽처럼 서로 닮아 있습니다.
내가 형이라고, 혹은 동생이라고 속여도 뚜루뚜뚜루뚜는 알아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뚜루뚜뚜루뚜는 금방 사진에 싫증을 내고는 내 곁을 떠납니다.
나는 조금 더 사진들을 봅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인화지 속에 남아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아기의 사진을 만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