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꽃, 그리고 첫 번째 생일
103.
아기가 열이 오릅니다.
열이 난다는 것은 몸 안에 나쁜 세균이 들어와 백혈구가 싸우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아기는 아직 너무 작고 어려서 항생제를 함부로 복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의 옷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에 적신 가제수건으로 아기의 몸을 닦습니다.
물기가 증발하면서 열을 떨어뜨립니다.
아기가 웁니다.
울음도 시들합니다.
오래된 복숭아처럼 울음이 물크러집니다.
아내와 나는 번갈아 아기를 안고 달랩니다.
밤은 길고 깁니다.
도무지 날이 밝아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무서운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응급실에라도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냅니다.
아내는 응급실에 가도 특별히 내릴 수 있는 처방이 없다고 합니다.
소아과 의사가 쓴 두꺼운 책을 뒤적입니다.
우리는 아기의 몸을 과산화수소로 닦아줍니다.
104.
아침이 밝아오면서 열은 한풀 꺾입니다.
낮에는 상대적으로 몸 상태가 양호한데,
해질녘이 되면 다시 열이 오르기를 며칠째 반복합니다.
토실토실했던 아기가 홀쭉해진 것만 같아 속상합니다.
“돌이 되기 전에 액땜을 한 번 하고 넘어가기 마련이야.”
어른들이 말할 때만 해도 액땜은 무슨 놈의 액땜,
아무 탈 없이 지나가야지 했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은 예상외로 정확합니다.
돌잔치를 하루 앞둔 밤까지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내와 나는 돌잔치를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미 초대장을 돌리고 식당까지 예약을 해둔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이 큽니다.
열이 올라 뒤척이던 아기가 잠이 듭니다.
아내가 미리 준비한 돌잔치 의상이 잘 다려져 옷걸이에 걸려 있습니다.
아내는 아기의 첫 생일을 위해 친구에게 제법 근사한 재킷과 와이셔츠까지 빌려왔습니다.
파란 나비넥타이가 앙증맞은 정장입니다.
나는 잠든 아기의 옆에서 뒤척입니다.
105.
아침이 밝아옵니다.
아내가 다급히 나를 부릅니다.
나는 아내에게 달려갑니다.
아기의 몸에 눈雪의 결정체 같은 붉은 반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라 어리둥절합니다.
돌잔치 시간에 맞춰 집으로 온 어머니가 아기를 보더니 열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고 말합니다.
열꽃은 열이 빠져나간 후에 생긴다고 합니다.
나는 발긋한 아기의 피부를 봅니다.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나봅니다.
부모가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무서운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기가 열이 오르고 울어대면 부모는 정말이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기의 몸이 불구덩이인데도 해줄 수 있는 게 이렇게 없다니,
작고 여린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돌잔치가 시작되고 양가 어른들과 누나들, 그리고 매형들과 처남이 신기한 듯 아기의 열꽃을 봅니다.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위해 열병을 견뎌낸 아기가 대견합니다.
나는 아이에게 보내는 첫 번째 생일 축하 문장을 씁니다.
돌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나는 한 해 동안 아기를 찍은 사진들을 모아 슬라이드 쇼를 준비했습니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바뀔 때마다 아기가 점점 자라납니다.
지난 1년의 순간들이 메모리 카드에서 차례차례 불려 나옵니다.
아비가 겁에 질린 큰 뚜루뚜를
제 기분에 취해 번쩍 들어 올린 사진 위로
슬라이드 쇼의 마지막 문장이 떠오릅니다.
“큰 뚜루뚜야,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줘.
우리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사랑했어.”
아기의 첫 번째 생일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공식적인 서류를 준비할 때면 서양식으로 만滿 나이를 적지만,
나는 아기가 어미의 뱃속에 머무른 10개월도 나이에 포함하는, 우리식의 셈법이 더 마음에 듭니다.
아기는 이제 두 살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 없던 존재가 생겨나 이제 우리 곁에서 숨을 쉽니다.
정말이지 이 첫 번째 생일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