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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우 Jun 04. 2018

16_아름다움은 부족함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106.

한순간 아기는 벽을 잡고 일어섭니다. 

짧은 직립의 순간을 맛봅니다. 

하지만 이내 균형을 잃고 휘청대다가 쓰러집니다. 

바닥에 머리를 쿵 찧어 그악스레 울어대기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또 다시 시도합니다. 


마침내 아기가 균형이 무너지는 쪽으로 한 발을 내딛습니다. 

다시 무너지려는 균형을 회복하며, 

한 발, 

또 한 발. 


아기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우스꽝스럽게 걸어갑니다. 

뒤뚱대며 걷는 폼이 위태롭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아내를 향해 빨리 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내와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박수를 칩니다. 


아기가 홀로 섭니다. 

홀로 서서 걷습니다. 


아기는 자신만의 힘으로 일어섰습니다. 

딱히 누가 걸음마를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아내와 나는 기다려주고, 응원을 해준 게 전부입니다. 


이 명징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07. 

아기가 혀를 놀려 첫 단어를 말합니다. 

모든 아기들에게 주어지는, 그 첫 번째 단어입니다. 

아기가 한때는 자신이던 여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괄호 밖으로 밀려납니다. 

몹시 서운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외톨이의 처지에 익숙해진 탓에 나름 요령껏 마음을 추스릅니다. 


어미는 당당히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기가 말문을 트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발음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어무마므.......” 


우리는 다시 입에 거품을 물고 박수를 칩니다. 


아기는 막 말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말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합니다. 


애써 꾹꾹 눌러놓은 질투심이 다시 내 안에서 일어서는 걸 느낍니다. 

아내가 보지 않을 때면 나는 아기에게 ‘아빠’를 가르칩니다. 

“아빠, 해 봐. 아빠.” 

아기는 아빠를 발음하지 못합니다. 

아빠는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음운이 아닙니다. 

엄마, 마미, 마더, 마마 같은 발음이 훨씬 유리합니다. 

옹알이만 해도 어떤 때엔 얼핏 ‘엄마’처럼 들립니다.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언제쯤, “아빠”하고 불러줄까요? 


나는 기다립니다.      







108. 

아기의 옹알이는 점점 말이 되어갑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물어야 아이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챕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내는 단박에 아이의 말을 이해합니다. 

내가 헤매고 있으면 아내가 답답한지 끼어들어 아기의 말을 통역해줍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기의 말은 대명사에서 시작합니다. 

아이는 아직 사물의 이름들을 명확히 모릅니다. 

아이를 둘러싼 세계의 사물들은 ‘이거’, ‘저거’로 불리어집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사물의 이름들을 말해줍니다. 

“이건 책이야, 이건 젓가락이고, 이건 양말.” 하는 식입니다. 


대명사는 차츰차츰 명사가 되어갑니다. 

아이를 둘러싼 세계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아기의 안으로 들어옵니다. 

명사들의 세계는 무한합니다. 


아기는 말의 세계로 들어와서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이건 뭐야?” 

“저건?” 

“요건?” 

아이는 쉴 새 없이 묻습니다. 


명사의 뒤에 동사가 붙고, 그 사이사이에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듭니다. 

말은 점점 온도와 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단어나 구절로 짤막하게 말하는 시기가 지나가면 말은 조심스레 문장이 됩니다. 

문장은 불완전하고, 맥락은 곳곳에서 어긋납니다. 

하지만 의도는 충분히 전해집니다. 

표정이나 손짓 같은 것들이 아기의 불완전한 말을 보완합니다. 


아이의 말은 순수해서 기발하고, 완전하지 않아서 창조적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움은 완전한 형식에서 생겨난다기보다 어떤 부족함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09.

나는 가만히 아기를 봅니다. 

아기는 단어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단어들이 아기의 입에서 떠듬떠듬 흘러나옵니다. 


신이 말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아기가 말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과, 

하나의 목판으로 찍은 두 장의 판화처럼 정확히 일치합니다. 


태초에 어둠과 고요만이 넘쳐나는 무無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 무엇도 없는 세계. 

존재하는 것이라곤, 전능한 자와 전능한 자의 말言뿐인 세계. 


아기가 그것들을 해와 달과 별이라고 말하기 이전엔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고요만이 넘쳐나는 무의 세계였습니다. 

존재하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해가 비로소 해가 되고, 

달이 비로소 달이 되는 것은, 

별이 비로소 별이 되는 것은, 

아기가 그것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전능한 자가 “빛이 있으라.” 말하자 빛이 생겨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그러하고, 한 생명의 태초에도 그러합니다. 


이 세계가 이 세계가 된 까닭은,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이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이 된 까닭은,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온갖 것들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기가 그것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낱말을 알게 되면 하나의 사물이 생겨납니다. 

아기는 사물의 이름을 말하고, 

사물은 이름이 불리어지는 순간 아기를 봅니다. 

둘은 눈을 맞추고, 서로를 향해 교감합니다. 


아기를 둘러싼 세계가 창조됩니다.      







110. 

아이의 언어능력이 향상되면서 아이의 세계는 자연스레 첫 번째 빅뱅을 일으킵니다. 

서서히 자신의 취향과 감정이 생겨납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겨나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합니다. 

웃고 울고 화내고 풀어집니다. 


아이의 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말은 미흡할지 몰라도 아이의 감정은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아기는 사람을 봐가면서 화법을 정합니다. 

엄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공손해지고, 물렁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떼를 씁니다. 

아이가 조르고 울고 화내고 토라집니다. 


어느새 아기는 내달립니다.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흘러갑니다. 

공놀이를 하고 미끄럼틀을 탑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개그맨의 흉내를 내서 우리의 배꼽을 빠지게 만듭니다. 


색깔과 동물과 도형을 구분합니다. 

내 것과 네 것의 개념을 이해하고, 원인과 결과를 연결해서 말합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감정을 표출합니다. 

날씨를 알아맞히고 요일을 묻고 기분을 말합니다. 

때때로 말과 마음이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조차 알고 있습니다. 

말을 하고 말을 듣지만, 말보다는 마음을 느낍니다. 


나는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사과합니다. 

훈육을 해야 한다고 느낄 때엔 엄하게 아기를 대합니다. 


우리 사이에 여러 질감의 말이 오고갑니다. 

어떤 말이 오가건 간에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다양한 말은 다양한 채널이 됩니다. 

우리의 첫 번째 규칙은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비도, 아이도 그 룰을 준수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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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을의 아주 오래된 시 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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