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문은 사랑을 전하기 가장 좋은 문장형식입니다
111.
아이는 듣고 말합니다.
또 말하고 듣습니다.
들려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에게 심겨집니다.
말은 아이의 내부로 들어가 아이가 하는 말의 질료가 됩니다.
이제 그 말은 아이의 말이 되어 밖으로 나갑니다.
말은 말로 이어지고, 말은 또 다른 말이 되어 돌아옵니다.
듣는 말과 말하는 말은 분리되어 있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서 그것들은 뒤섞입니다.
무엇이 무엇이고, 무엇이 무엇이 아닌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말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생각이 되고,
한 사람의 질문이 되고,
한 사람의 해석이 됩니다.
아기의 내면으로 들어가 뼈가 되고 살이 됩니다.
결국 말은 말 이상의 무엇이 됩니다.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아비의 말을 합니다.
아이는 아비의 말을 듣고 아이의 말을 합니다.
우리의 말이 서로 오갑니다.
나는 아이의 말로 나를 돌아보고,
아이는 아비의 말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존중하며,
서로의 편이 되는 꿈을 꿉니다.
딱히 결론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112.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필연적으로 의문문을 사용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매번 그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의문문은 사랑을 전하기 가장 좋은 문장형식입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오늘은 어디로 바람을 쐬러 갈까?
이번엔 어떤 노래를 들을까?
나는 아내와 뚜루뚜뚜루뚜에게 묻습니다.
113.
질문은 대답을 요구합니다.
선택지는 열려 있습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반영하여 대답합니다.
의문문은 자연스레 문답이 되고,
문답은 이어지며 대화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서로의 세계에 다가갑니다.
물론, 서로의 의견이 상충되고, 끝내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더러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과 기호만 내세우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부작용도 생깁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문답 끝에 생긴 충돌이 일방적인 결정보다는 낫습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존중’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존중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어떤 의견도 묻지 않습니다.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한 사람은 자존감을 획득하게 됩니다.
존중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하게 됩니다.
공자는 “알아도 묻는 것이 예禮”라고 했습니다.
빤히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은 순간에도 여전히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뭘 알겠어?
보나마나 이걸 선택할 걸,
하고 생각해버리면 안 됩니다.
아이에게는 엄연히 아이의 느낌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들을 때, 사랑은 바로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114.
나는 뚜루뚜뚜루뚜와 낱말카드를 만듭니다.
무지개색 싸인펜으로 큼지막하게 낱말들을 씁니다.
먼저 자신의 몸에 있는 것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눈코입귀, 팔다리손발.......
다음으로 선택된 단어군은 자연에 관한 것입니다.
해달바람별, 산바다눈비.......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낱말들과 집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의 이름들이 선택됩니다.
그리고 감정을 나타내는 낱말들과, 탈것들, 동물들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낱말카드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아이의 세계도 조금씩 확장됩니다.
나는 뚜루뚜뚜루뚜와 거실 바닥에 낱말카드들을 열과 오를 맞춰 펼쳐놓습니다.
거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낱말카드들이 가득 들어찹니다.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
뚜루뚜뚜루뚜는 자동차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미니카 장난감이 제법 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자동차 운반차량을 가져온 뚜루뚜뚜루뚜가 붕붕 출발선에 섭니다.
나는 아이폰의 스톱워치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합니다.
“햇살!” 하고 내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스톱워치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큰 뚜루뚜는 ‘햇살’이 적힌 카드를 찾기 위해 낱말카드들을 분주히 들여다봅니다.
좀처럼 찾지 못할 때에는 슬쩍 힌트를 줍니다.
빨강색 글씨, 오른쪽·왼쪽, 위·아래....
뚜루뚜뚜루뚜는 낱말카드를 발견하고 자동차를 출발시킵니다.
낱말카드의 사거리를 지나 ‘햇살’을 향해 달려갑니다.
낱말카드를 싣고 돌아오는 뚜루뚜뚜루뚜가 환하게 웃습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스톱워치의 중지 버튼을 누릅니다.
요즘엔 아이패드의 앱이나 각종 시청각자료로도 한글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나는 낱말카드를 고수합니다.
시대에 뒤처지는 아날로그 방식이지만, 몸으로 움직이며 익힌 말들은 훨씬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 낱말카드들이 쌓여 아이만의 언어가 되어주리라 희망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만한 무언가는,
언어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이의 언어는 점점 확장되어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확대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 거기에 있는 것들로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가치와 관점을 반영한 말들로 아비를 넘어서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나갈 것입니다.
먼 훗날, 세상을 떠도는 그 어떤 소문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뚜루뚜뚜루뚜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붕붕.
뚜루뚜뚜루뚜의 미니카가 공회전을 시작합니다.
내가"자유"하고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출발선의 미니카가 낱말카드의 사거리를 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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