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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우 Jun 19. 2018

20_아이는  자신만의 방향을 발명합니다.

“나는 똥이 되고 싶어.”

127.

대학의 영문과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대학 기숙사에서 아이들이 숙식을 하며 3박 4일 동안 영어캠프가 열립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여전히 밝고 해맑습니다.

식사는 학교 식당에서 하는데, 점심에 식사와 함께 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날 간식으로 단팥빵과 곰보빵, 크림빵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은 이 세 종류의 빵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친구는 아이들을 인솔하다가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줄이 줄어들어 배식이 가까워오자 아이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마트폰을 꺼내 듭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친구는 아이들이 일제히 어디로 전화를 거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은근슬쩍 다가가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들은 묻고 있습니다.

“엄마, 단팥빵이랑 곰보빵이랑 크림빵이랑 나왔는데, 어떤 거 먹어요?”


정말 아이들이 전화를 걸었던 걸까요?

아니면 친구의 이야기가 다소 과장된 걸까요?

왜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과 기호로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하는 걸까요?

자신의 선택권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대리자를 내세우게 되었던 걸까요?


소름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몸이 오싹합니다.

무언가가 아이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삼켜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의 과장도 하지 않고 말하는데,

이것은 비단 단팥빵과 곰보빵과 크림빵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128.

사실 이런 이야기에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도시의 어떤 일면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미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기야,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해.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기쁘면 나도 기뻐.

우리는 둘이 아니야.

우리는 하나야.”


어미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문장들이 끝없이 공명합니다.

어미는 종종 자신과 아이를 하나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자칫 실수를 할 수 있는 아이를 대신해서 무언가를 선택해줍니다.


“내가 너한테 나쁜 걸 주겠니?”

세상의 엄마들이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엄마의 선택은, 혹은 아빠의 선택은 좋은 걸까요?

전화를 받은 엄마는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그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세 종류의 빵 중 하나를 선택해주었을까요?

만약 뚜루뚜뚜루뚜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지도 아울러 고민해보았습니다.


“그걸 왜 엄마한테 물어? 네가 원하는 걸 먹어야지.”

아마도 이 정도 대답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실은 그 무엇도 해소되지가 않습니다.

아이가 제때에 자신의 기호와 취향대로 선택들을 하나하나 결정하는 훈련을 했다면,

아이는 결코 세 종류의 빵들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129.

사실 선택이란 근원적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이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잘못된 길을 고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누구라도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나쁜 선택을 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가급적 선택의 결정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누구에게나 조금은 있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급 식당에 가면 웨이터가 손님을 안내해 자리를 지정해줍니다.

최고급 식당이니까, “손님 어디에 앉고 싶으세요?”하고 질문을 할 것 같지만,

결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권한을 주는 것은 손님을 불편하게 합니다. 

여기가 좋은 자리 같기도 하고, 저기가 좋은 자리 같기도 합니다.

웨이터는 자연스럽게 손님을 안내해 자리를 지정해줍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안도합니다.

‘아, 여기가 좋은 자리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30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연코 직접 선택해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왜 굳이 잘못된 선택을 해야 합니까!"

누군가 내게 따진다면 나는 말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애당초 완벽한 선택이란 없으며,

오로지 한 사람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고.


대리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선택을 선사하려는 것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택의 기회를 앗아갑니다.

선택이라는 경험을 해볼 기회가 매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대리자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것이 말끔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선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31.    

나는 큰 뚜루뚜의 손을 봅니다.

손이 숟가락을 향해 다가갑니다.

왼손입니다.

그 후로도 아이는 꾸준히 왼손을 사용합니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오른손잡이입니다.


아내와 나는 서로 의견을 나눕니다.

 “세상의 온갖 도구들은 오른손잡이 위주로 갖춰져 있잖아, 아무래도 왼손잡이는 불편할 거야.”

아내가 말합니다.


나는 아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의견을 내놓았는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선뜻 그 말을 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132.

“이을이, 왼손잡이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은 내가 글씨를 쓰는 걸 유심히 지켜보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꽁꽁 얼어붙습니다.

떠드는 아이들의 양말을 벗기고 책상 위에 다리를 뻗게 한 후, 발바닥을 때리는 무서운 선생입니다.

그는 공포정치를 선택한 독재자입니다.

선생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무언가가 묻어납니다.

나는 뭔가 잘못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나는 아무리 때려도 발바닥은 멍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생은 왜 하필 아이들의 발바닥을 때렸던 걸까요?

선생은 그 사실을 어디에서 알게 되었던 걸까요?

이 체벌은 군복을 입던 자들이 대통령이 되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걸까요?


놀이터의 초등학교 1학년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매를 휘둘렀는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133.

학기 초, 어머니가 학교를 방문합니다.

선생과 상담을 하고 나온 어머니가 말합니다.

“이을아, 선생님이 이제 오른손을 써야 한대. 알았지?”


“왜?”

원래, 그런 거야.

원래라니.

작은 뚜루뚜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이지 ‘똥 소리’입니다.

하지만 선생과 어머니가 그렇게 해야 한다니,

어린 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생은 내가 왼손을 쓸 때마다 주의를 줍니다.

“왼손으로 쓰면 안 된다니까.”


나는 오른손으로 글씨를 씁니다.

덕분에 공책의 글씨들은 내 마음처럼 한껏 삐뚤빼뚤합니다.

이미 몸에 단단히 들어온 습관은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반응합니다.

그래서 자꾸 왼손이 먼저 나갑니다.

오른손은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왜 왼손잡이를 터부시 했던 걸까요?

사회 전체가 레드 콤플렉스로 인한 결벽증이라도 앓고 있었던 걸까요?

하나의 기준에 맞춰 일렬종대를 세우고야 마는 획일성이 영향을 끼쳤던 걸까요?

정확히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름방학이 끝나고 어머니는 멀쩡한 내 왼손에 깁스를 했습니다.

담임선생이 내린 특단의 조치를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덕분에 여름 내내 나는 오른손을 써야만 했고, 조금씩 오른손의 사용에 익숙해졌습니다.


깁스 안에 갇힌 팔뚝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울 때면 망치로 깁스를 깨버리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을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고작, 여덟 살짜리 소년이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오른손잡이가 되었습니다.


담임선생이 주도하고, 어머니가 수용한 개조 작전이 성공한 셈입니다.

방학이 끝나고 나는 오른손으로 글씨를 썼고,

담임선생은 더 이상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일사천리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내 왼손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곤 했고,

그럴 때면 나는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처럼 재빨리 주위를 살피곤 했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암약하는 고정간첩처럼,

내 안에서 생겨난 고유함을 억누르며 

오른손잡이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134.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말합니다.

아내가 나를 봅니다.


“이건 첫 번째 선택이잖아. 아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거야.

아내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비의 의견을 따라줍니다.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아이의 선택을 바라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는 큰 뚜루뚜에게 은근슬쩍 양손을 써볼 것을 권합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하면 좋다는 말을 슬쩍 흘립니다.

오른손잡이는 좌뇌가 발달하고, 왼손잡이는 우뇌가 발달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큰 뚜루뚜는 이미 자신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 옛날의 나처럼 아이의 왼손이 움직입니다.


큰 뚜루뚜의 방향은 재미있습니다.

큰 뚜루뚜는,

손은 왼쪽,

발은 오른쪽을 선택합니다.


작은 뚜루뚜가 숟가락을 들게 되었을 때, 비슷한 상황이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이번에도 아내와 나는 선택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왼손입니다.


나는 이번에도 잊지 않고 양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슬쩍 권유합니다.

작은 뚜루뚜가 내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이는 언제부턴가 양손을 사용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글씨를 쓸 때는 왼손을.


큰 뚜루뚜는 큰 뚜루뚜대로,

작은 뚜루뚜는 작은 뚜루뚜대로

자신만의 방향을 발명합니다.

 


    





135.

아이는 아이의 선택을 하면 됩니다.

이건 최초의 선택이라고 불릴 만한 선택입니다.

최초의 선택부터 누군가가 개입해 대신 정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직은 어리잖아" 하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리기 때문에,

최초의 선택이기 때문에,

외려 아이가 자신만의 의지로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의 대리자가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것은 명백히 부당한 일입니다.

누군가 아이의 선택을 대신해줄 때에 아이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준 것들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 대신 그것을 선택해준 그 누군가의, 것일 뿐입니다.      








136.

아내는 유치원 엄마들 모임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내게 들려줍니다.

자기 아이가 얼마 전까지 의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최근에 되고 싶은 게 바뀌었다면서,

한 엄마가 한숨을 내쉽니다.


 “그게 뭔데요?”

“글쎄, 환경미화원이 되고 싶다지 뭐예요.”

(환경미화원 여러분 죄송합니다. 부모란 작자들은 다 이 모양입니다.)


그러자 다른 엄마가 그건 약과라면서 더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환경미화원이 되고 싶다는 아이를 둔 엄마가 대체 왜 그러지? 하고 의심의 눈길로 그 엄마를 봅니다.

“우리 애는, 글쎄, 이 되고 싶대요.”

엄마들의 입에서 풉,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햄이 되고 싶은 아이의 엄마만 웃지 않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햄을 좋아할 겁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햄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은

무엇이 자신의 재능인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이든 좋아해도 되고,

무엇이든 말해도 되고,

무엇이든 되고 싶어 해도 되는 것.


이상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도시에서는 이 당연한 것들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햄이 되고 싶다는 그 아이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햄 같은 게 된다고 해도 되나?

아이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자신 안에서 생겨난 것을 말했습니다.






137.

언젠가 큰 뚜루뚜의 친구들 가족과 함께 캠핑을 갔을 때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넌 뭐가 되고 싶니?” 묻습니다.

한 아이가 자신은 판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판사가 뭐하는 사람인데?”

한 아버지가 다시 묻습니다.

“잘못한 사람들 벌주는 사람이에요.”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게 왜 되고 싶은데?”

“그냥, 되고 싶어요.”

부모들은 대답한 아이의 부모에게 판사 아들 두셔서 좋겠네요! 농담을 합니다.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집니다.


그렇다면 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판사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요?

설마, 이제 막 네 살이 된 아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발송했습니다.


'아이가 장래에 무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가정통신문에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성적표의 장래희망 칸에는 학생과 부모의 칸이 각각 따로 있었으니,

이런 질문도 무리는 아닙니다.


친구는 내게 한 학부모가 보내온 대답을 말해줍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이의 꿈은 아이에게 질문해주세요.”






138.

나는 큰 뚜루뚜를 봅니다.

“너는?”

큰 뚜루뚜는 친구들과 야외에 나온 게 신이 나서 거의 광란 상태입니다.


“너는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 나는 큰 뚜루뚜에게 묻습니다.

이런 질문을 큰 뚜루뚜에게 하는 건 난생처음입니다.


“나? 나도 되고 싶은 게 있지.”

“그게 뭔데?”

나는 큰 뚜루뚜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슬그머니 양 옆으로 찢어집니다.


“나는 똥이 되고 싶어.”

큰 뚜루뚜가 거의 절규하듯이 깔깔거리며 대답합니다.

그러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똥, 똥, 똥!”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큰 뚜루뚜뚜루뚜의 친구들도 함께 "똥, 똥, 똥"을 외칩니다.

거대한 똥의 떼창이 울려 퍼집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남몰래 안도합니다.

이 대답이야말로 아이다운 대답입니다.

큰 뚜루뚜가 친구들과 함께 저만치 달려갑니다.




김이을 작가의 '뚜루뚜뚜루뚜와 함께 한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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