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극은 넘으라고 있는 것)
영국을 자주 갔었다.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메트로를 타면 된다. 메트로를 타고 정차할 때면 쉴 새 없이 듣는 멘트가 있다. ‘마인더 갭(mind the gap)’이다. 처음에는 '왜 우리는 저런 안내를 안 하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근래에 '발 빠짐 주의'라는 멘트를 하는 것으로 안다.
‘마인더 갭’ 그 방송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내가 영국에 도달한 것을 일깨워 준다. 갭, 즉 사이의 공간이다. 메트로 객차와 플랫폼 사이의 간극이다. 그런데 그 간극은 사실 그리 넓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전혀 그리 크게 발 빠짐을 걱정할 넓이가 아닌 것이다.
이 간극은 메트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를 부산 양정동에 있는 양정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의 정문으로 가는 양쪽에 기다란 하천이 있다. 하천의 양쪽은 각각 ㄱ자 형태의 시멘트 벽으로 되었고 밑에는 그리 많지는 않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제는 어른 키 높이정도 되는 하천에 지금 같으면 당연히 만들어졌어야 할 난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실수로 또는 장난을 하다 다리 난간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이 있었다.
하천 높이는 제법 높아 어린 학생이 빠지면 혼자 힘으로 벽을 타고 올라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넓이 간극은 나이가 제법 든 형들 정도가 되어야 한꺼번에 그 간극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나는 호기심 또는 모험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제법 있었다. 언제 저 다리를 한번 건너뛸까 그 생각이 오래 누적되었다. 그리고 점점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때를 기다렸다. 시기의 정확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3- 4학년이 될 때였을 것 같다. 친구들과 다리를 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누가 최초로 뛰어넘을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고 내가 해보겠다고 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엄청 부담이 되었다. 실수해서 다리에 넘어지면 죽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넓은 다리를 건너뛰는 것은 결정이 쉽지 않았다. 몇 차례 멀리서 뛰어왔다가 간극 바로 직전에서 멈추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때 나를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말만 하고 중단하는 시도에 대한 수치심이 어릴 때에도 있었다.
드디어 숨을 크게 쉬고 마지막으로 몸을 솟구쳤다. 몇 초 후에 절벽 1에서 반대편 절벽 2로 건너뛰었다. 깜짝 놀랐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형들처럼 몸이 커진 듯했다. 그 후 나는 생각나면 심심풀이로 다리 뛰기를 실행했다. 보통의 용기를 가진 친구들도 이후 동참했고 신기하게도 아무도 다리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시대의 간극을 넘어 지금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건너야 할 간극을 뛰어넘는 시도를 막는 자는 누구일까. 외부의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스스로 저건 불가능해' 또는 '떨어지면 다리가 부러져' 하는 식으로 뛰는 것을 막는 것이다. 해 보지도 않고 도저히 건널 수 없다고 미리 판단해 버린다. 판단이 그리 섰는데 몸이 어찌 뛸 수가 있을까. 절대 불가하다.
전철에서 나오면서 발이 플랫폼 간극의 틈사이에 빠질 수가 있다. 년간 수백만 명이 전철을 이용하다 보면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간극이 별것 아닌 것인데 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살면서, 수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더 큰 위치에 도달할 수도 있건만 간극을 두려워 시도를 못하고 좋은 기회를 사장시킨다는 것이다.
간극은 어찌 땅에만 있을 것인가. 하늘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맞는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보면 절벽을 넘지 못하고 절벽 사이로 떨어져 죽는 많은 기마 부하들과는 달리 영화의 주인공은 힘차게 말을 달려 간극을 넘고 건너편 절벽 2로 사뿐히 내려 않는다. 이제 스토리의 영웅은 항공기를 최초로 이륙하려는 목숨을 건 시도를 하는 영웅들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영웅들이다. 초기 항공기를 제작하려는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시도를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초기 항공기 제작 모험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수많은 항공 선구자들이 자신이 설계한 항공기를 직접 시험하다가 생명을 잃었다.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 천만에. 그들의 희생이 현대 항공 기술의 초석이 되었다. 지금 달나라나 화성을 가는 것은 그들의 도움 덕이다.
비행기라는 형태 모형이 구체화되기 이전에 사망한 몇몇 항공기 제작자들을 생각한다.
오토 릴리엔탈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 같다. '글라이더의 왕'이라 불리는 인물로, 박쥐 날개를 본뜬 행그라이더를 이용해 2,000회 이상 성공적인 활공 비행을 했다. 정말 한없이 끈질긴 사람이다. 사망 원인은 1896년, 비행을 하던 중 돌풍을 맞아 글라이더가 추락했다. 그리고 척추 부상으로 다음날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었다. 그의 체계적인 비행 데이터와 사진은 라이트 형제를 비롯한 후대 항공기 개발자들에게 엄청난 영감과 자료를 제공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있었다.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Sacrifices must be made)"는 초기 항공기의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영국의 항공 모험가인 퍼시 필처 이야기이다. 그는 1899년, 자신이 설계한 신형 글라이더 '호크’의 시범 비행 중 비가 와서 실연을 미루었다. 대신, 이미 만들어진 구형 '호크'로 비행을 하다가 꼬리 부분이 붕괴되어 추락했다. 며칠 후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오토 릴리엔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사망 당시에는 소형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동력 비행기를 제작 중이었다.
미국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타고 측정을 하려던 군인 토마스 셀프리지는 1908년 윌버 라이트의 조종으로 비행기를 타던 중 추락했다. 라이트는 중상을 입었지만 셀프리지는 두개골 골절로 사망하였다. 그는 최초의 미국 군인 비행기 사망자가 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둘 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형인 윌버 라이트는 셀프리지 항공기 추락 사고 후 얻은 병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추락의 후유증'과 간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 1908년 버지니아 주 포트 마이어에서 군인들을 위한 시범 비행 중 심각한 추락 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그는 다리가 부러지고 여러 군데 골절을 입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 후유증으로 오빌은 평생 동안 고통을 겪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영웅들이 항공기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간극을 뛰어넘으려는 용기와 희생, 그리고 실패에서 얻은 데이터 덕분에 오늘날의 안전한 항공 여행이 가능 해졌다. 지금 보니 개천도 절벽도 그 간극은 별게 아니었다.
PS. 오늘이 45회 항공의 날이라고 알려준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 이 글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