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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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가 '명예로운 퇴직'의 준말이 맞다면 적어도 나에게 명예스러운 무엇이 생긴다는 말인데 뭐가 명예로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퇴직 후 받게 되는 연금이라야 월급보다 못할게 뻔하니 이건 당연 명예롭지 않은 것일 테고, 각종 회원 가입할 때 직업란에 이제부터는 교수 대신 무직, 혹은 주부라고 써야 할 테니 이것도 아닐 테고, 은행 대출액도 당연 줄었을 텐데 과연 무엇이 명예롭다는 것인지. 퇴직해서 그나마 있던 마통도 연장이 안된다고 그그저께 연락이 왔더만. '진즉 좀 하지 눈치도 없이'라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지나 않으면 다행인 게 명퇴인데. 요즘 명퇴는 명퇴가 맞긴한데 명퇴가 아닌 이상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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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간단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서류들은 심플했다. 이 학교에 들어올 때는 이력서, 경력증명서, 심지어는 신원조회 증명도 요구하더니 나갈 때는 종이에 이름 쓰고, 몇 가지 글짓기하고, 사인하고, 제출하니까 끝이다. 하긴 회사 사직서야 '일신상의 이유로....... ' 로 시작하는 사직원 딸랑 한 장인데 그래도 네댓 장 되니 이건 복잡한 축에 드는 거라고 생각해본다. 오랜 고민 없이 냅다 서류에 사인을 해서 그런가 일부러 '나 명퇴했어.'라고 알리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게는 왜 출근 안 하고 평일에 집에 있는지, 주말에만 약속이 된다던 사람이 왜 주중에도 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난 아직 나의 명퇴를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는 요약글이 없다. 제출이 바로 명예로운 퇴직이고 곧 독립을 의미했다. 물리적으로는.
서류는 해당 연도의 명퇴 시행계획 공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관련 학칙의 근거부터 신청 대상자의 기준, 절차 및 일정, 명퇴 수당의 지급 기준과 계산법 등, 여러 해 동안 할까 말까를 망설이면서 훑어보았던 내용과 뭐가 달라졌는지를 확인한다. 제일 중요한 명퇴 수당의 지급 기준과 계산법 역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내용이 바뀌었다면 그건 명퇴자에게 유리해지는 쪽은 아니었을 테니까. 구성원들 누구라도 "내가 이 나이에 월급 받으니까 참는다."를 주기도문처럼 중얼대면서도 매년 한 번씩은 명퇴수당 계산 공식에 내 기본급과 잔여기간을 입력하고 얼마를 땡길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던가.
명예퇴직수당 지급신청서에 자잘한 내용을 쓴다. 최초 임용일과 정년 예정일, 정년 잔여기간을 쓰고 근속기간을 계산한다. 만 28세에 시작했던 가르치는 일을 이 학교에서만 26년 6월, 다른 학교까지 하면 32년 6월이나 했단다. 오래 했네......... 33년을 딱 맞추면 좋겠지만 몇 해 전 교통사고로 1년 병가휴직을 했었는데 이게 근속 연수에는 6개월만 산입 된단다. 그렇게 법이 바뀌었단다. 자고로 개인이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 법이거늘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므로 이건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래서 32년 6월이다.
기간과 금액의 산수가 끝나면 사유서를 써야 한다. 명퇴에 적합한 사유라....... 내가 그만두겠다는데 굳이 이유를 써야 하나 생각하지만, 그리고 사유가 맘에 안 든다고 승인을 안 해주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왜 알려하는지. '서류의 간결화가 필요해.', '쓸데없는 빈칸이 너무 많아.'라고 중얼거리며 칸을 채운다.
1. 건강상의 이유...... 이거는 쫌 해당된다.
2. 직무 수행 환경의 변화...... 이건 쫌
3. 직무 수행 인식의 변화...... 이것도 쫌.
가장 적확한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뽑아 멋있는 문장으로 2번과 3번을 작성한다. 1번은 사실을 쓰는 것이어서 어렵지는 않은데 2번과 3번은 글짓기가 필요하다. 논문 쓸 때처럼 함축적이고 직선적인 어법으로 요지를 정확하게 집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이게 뭐라고. 써놓고 다시 읽어봐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더구먼 자고로 이런 글들은 어려워야 먹히는 법. 마지막으로 이사장 앞으로 사직원을 작성한다. 소속, 직위, 성명, 생년월일, 퇴직 희망일을 입력하고 마지막에 제출인; 아무개를 쓰고 옆에 날인한다. 예전에는 오로지 도장이었고 도장이 짱이었는데. 그래서 급할 때마다 찍으려고 판 목도장이 몇 개였던가. 요즘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림 수준의 사인이 아니라 읽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이름을 쓰란다. 제출인 이름을 쓰고 날인 난에 또다시 이름을 쓰는 어이없는......
마지막으로 '공적조서'를 작성한다. '0000년 부임 이래 학교에 봉직하면서 교육과 연구 및 대외활동을 통하여 학교와 유관분야의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블라블라.... '라고 근사하게 쓰고 자잘한 내용들을 번호를 붙여가며 첨부한다. 옛 기억을 뒤집어내려고 PC에서 '나의 연구' 폴더를 열어 본다. "맞아. 이런 것도 있었지."를 연발하며 새삼 30여 년간의 나의 치적에 대해 살짝 감동한다. 옆 방 교수가 놀러 와서 슬쩍 보더니 "그 파일 나한테도 좀 주고 가. 나도 언제 할지 모르는데."라며 섭섭한 마음을 보인다. 학교로부터는 총장 직인이 찍힌 '교직원 명예퇴직 결정 사실 통지서'와 학교 법인으로부터는 이사장 직인이 찍힌 '명예퇴직 승인 통보'가 전달된다. 기분이 묘했지만 다음 학기에 놀 수 있다는 사실이 진실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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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이 80, 섭섭이 20쯤. 아닌가? 시원이 90, 섭섭이 10인가? 시원이 100은 아니니 섭섭이 어디쯤, 얼마만큼은 있을 텐데........ 아무튼 난 퇴직을 저질렀다. 독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