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님입니다.

고용계약서

by 깨진돌

대치동이냐 목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춘기 아이의 성적표는 매번 엄마를 깊은 수렁에 빠트린다. 성적표에 새겨진 이 숫자들이 내 아들의 점수인가, 이번 주 로또 번호인가. 한참을 들여다봐도 출구가 보이지 않으니 우리도 성지 순례를 떠나야 하나 고민이 된다.


"엄마,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며!"


그땐 그랬지. 뭘 몰랐었지.


건강과 성적의 대 역전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엄마가 있을까?

있다. 단 한 사람, 우리 엄마!


"엄마! 성적표에 도장 찍어 오래."

"문갑 첫 번째 서랍에 있어. 찍어 가."


도장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엔 점수를 꽤나 잘 받았길래 혹시 보려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였다. 시험 기간, 저녁때가 지나도록 자는 딸을 깨우지도 않고 두는 분이시니 오죽하랴. 공부하다 열 두시가 넘을라치면 냅다 방 불을 꺼버리는 엄마는 대한민국에 우리 엄마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고학력 커리어우먼 엄친딸보다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되기를 원했다. 갓 학생티를 벗은 청년이 평생 주부 고용 계약서를 쓰러 오던 날, 엄마는 그제야 직접 도장을 찍었다.


성적표도 안 보던 무관심한 엄마는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게,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 전화로 투정을 부리는 딸에게 여전히 그날의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묻는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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