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문자
바짝 자른 스포츠머리, 청바지 속에 욱여넣은 니트 베스트, 상하체를 갈라놓는 버클 큰 가죽 벨트. 단정함과 반항심의 부조화를 갖춘 이 남자가 오늘의 소개팅 상대다.
'제발 그 니트는 벗어던지고 셔츠 좀 빼서 입으라고!'
아침부터 입어 본 옷이 열 벌도 넘는다. 공들여 한 화장의 눈꼬리 하나가 맘에 안 들어 고치고 또 고쳤건만. 나의 부지런함을 무색하게 만드는, 십 년 전 길거리 인터뷰에서나 봤음직한 남자의 옷차림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나도 오늘 처음 만난 거예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흔들리는 나의 시선이 행여나 설렘으로 비칠까 봐 속으로 애국가를 열창하던 중, 남자가 저음의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전 배가 불러서 밥은 못 먹을 거 같은데, 이동하지 말고 차만 마실까요?"
한 발 늦었다. 이마를 탁 치고 싶다. 내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출발선을 잘못 섰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잖은가.
"네. 저도 밥생각이 없네요."
앗, 또 실수다. 이번엔 습관적으로 나온 미소가 문제였다. 그래도 소개해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너그러운 내가 참아야지. 웃자, 웃어!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이 마지막임을 공식화하는 멘트를 뒤로 하고 집으로 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자존심에 밥도 안 먹었단 얘기는 못하겠고 조용히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느글거리는 속을 내려 주는 얼큰한 한국인의 맛! 허기가 채워진다.
침대에 누워 두 시간 대국을 복기해 본다. 정해지지 않은 다음 상대를 위한 자기반성과 평가의 시간은 나를 더 단단하게 할 것이다.
"위이이잉"
짧은 진동음에 집중력이 흐려져 무시해 보지만 새어 나오는 빛이 자꾸 방해를 한다. 참선의 시간을 방해하는 자, 누구인가.
" 잘 들어가셨나요? 내일 점심에 시간 되시면 식사하시겠어요?"
다행이다. 이제야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