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님입니다.

아직은 쓸 만해요

by 깨진돌

무소음 7 엽 날개 고효율 BLDC 모터


선풍기를 하나 사려는데 이것도 '스펙'이라는 것이 있어 고민을 하게 만든다.

'잘 때는 조용했으면 좋겠고 고장은 잘 안 나야 하고... 이왕이면 디자인도 봐야겠지?'

에어컨 찬바람이 싫은 나의 고집 때문에 종일 돌아가던 구식 선풍기는 이제 쉬게 해달라고 달달거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장바구니에서 며칠을 숨죽이던 신입이 드디어 채용되는 순간이었다.


신입도 퇴사자도 넘쳐 나는 2025년, 18년 차 직장인은 참으로 귀한 존재다. 젊음의 혈기를 누르고 남모를 서러움을 삼켜내야 가능한 연차인 것이다.


역시 그렇게 연차를 쌓아 왔다.


신입은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아침마다 확인하는 메일함에는 수십 개의 할 일들이 줄지어 있었고 이 중 대부분은 내 일도 아니었다. 이러니 늘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혼이 나도 당최 그게 뭔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상사 기분 살피기는 분명 내 담당이니 별표 체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경조사 장기 프로젝트도 단박에 어그러질 수 있으니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눈치 싸움의 성공과 실패의 반복, 그게 내 하루 일과였다.


그렇게 매일이 쌓이다 보니 나는 어느새 18년 차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옆 집 아무개 아빠는 이번에 장기근속 휴가도 받고 보너스도 나온다는데...'


보너스는커녕 혹시나 해서 들춰 본 내 통장엔 월급이 드나든 흔적조차 없다.


공짜! 빠른 회전!(단, 모터 부하 시 소음, 잔고장 있음)


장바구니에 담기도 힘든 스펙으로 용케 18년을 버틴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스펙 7년 차 며느리의 중대 하자도 달갑지 않은 상황에 AS 요청까지...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짜증에는 이유가 있었다.


쌩쌩한 신입이 들어오면 저 오래된 선풍기는 분명 버리기로 했는데... 자꾸만 망설여진다.


'그래도, 어머니... 전 고쳐 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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