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님입니다.

잊은 물건은 없으신가요?

by 깨진돌

크지도 않은 이 특별한 도시에는 25개 자치구와 426개의 동이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도 타고난 길치인 덕에 생경한 동네가 수두룩하다. 그래도 개중에는 나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듯 친숙한 동네들이 있다.


"네, 평창동입니다."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드라마 속 아주머니들은 얼굴만 한 수화기를 가져다 대며 꼭 그렇게 말했다. 발끝까지 오는 반짝이는 융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우리 엄마보다 한참은 덜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내 말의 시속은 KTX 급인데, 저 일곱 글자는 무궁화호를 타고 나무마다 각기 다른 초록을 감상하며 여유 있게 귓가로 들어왔다.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고상한 여인도 화가 단단히 날 때가 있었다. 깔끔한 쓰리 피스 슈트를 즐겨 입는 그녀의 아들이 사랑한다는, 그 어린 계집애만 보면 울화가 치미는 듯했다. 사람 많은 카페에서 물 한 컵을 탈탈 털어 그 어린 여자의 얼굴에 쏟아낼 때가 특히 그러했다. 그 찰나에도 바로 옆에 놓인 김이 나는 새카만 커피를 선택하지 않은 그녀의 고상함이란! 실로 경이로웠다.


잔잔한 호수보다 고요하던 그녀도 그때만큼은 목소리의 데시벨을 한껏 끌어올렸다. 정난정, 신애리 같은 여자들의 단골 멘트가 그녀의 입에서 고루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툼한 흰 봉투로 미리 값을 지불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교양 있는 사모님들은 평창동, 성북동 가리지 않고 그냥 다 그랬다.


찰랑거리는 소재감이 느껴지는 원피스 실내복과 곱게 칠한 손톱, 커피보다 검은 머리는 드라마 밖의 평범한 노인도 사모님으로 만들어 주었다.


사모님은 평창동에만 사는 게 아니었다.


사모님의 그 귀한 아들은 다행히도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잔뜩 뿔이 난 사모님은 오늘도 눈을 가늘게 뜨고 딱딱한 말투로 송곳을 뱉어 내신다. 이 장면 속 주인공은 언제나 어머니와 나, 언제 던져질지 모를 물 한잔뿐이다.


오늘도 봉투는 깜박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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