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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by 고생끝에골병난다

-‘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시대

’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시대. 나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칭한다. 2n년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세상은 늘 그랬다. 평범함을 쟁취하기 위해 평생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경쟁이 안 맞는 사람들도 있다. 나처럼 말이다. 어렸을 땐 주변 어른들에게 “넌 왜 그렇게 경쟁심이 없니?”라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랬던 나도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옆 반 모범생 친구의 성적을 몰래 알아보고, 나보다 시험을 못 봤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왜 그렇게 변했던 걸까. 한국의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왜 그렇게 서로를 질투하며 경쟁에 몰두할까. 나는 그 이유를 ‘정상투쟁 사회’가 되어버린 현대 문명에서 찾는다.


<한겨레 신문> 오금택 만평

-생애주기별 정상성에 대한 집착

‘정상투쟁 사회’. 정상성을 쟁취하기 위해 무한경쟁에 골몰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착안한 단어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특히 두드러진다. 정상성에 대한 갈망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생애주기 별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다. 일반적으로 10대 학생들은 ‘학생다울 것’을 요구받는다. 순종적으로 학업에 열중하며 소위 ‘인서울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20대에는 그럴듯한 정규직 일자리를 쟁취해야 하며, 30대에는 정상 가족을 꾸려야 하고, 40대에는 수도권에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 쟁취해 놓은 가족, 주택, 자산의 보호를 받으며 여생을 즐겨야 한다. 안전한 노후를 보장하는 역할은 사회 시스템이 맡는 것이 옳으나, 일부 선진국을 제외하면 노후 안전망을 주택이나 가족에게 ‘외주화’해버린 탓이다.


이게 한국 사회가 규정하는 소위 ‘평범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조사를 살펴보자. 2019년 기준 한국의 노동자 2056만명 중 비정규직은 856만명으로 전체의 42%를 차지했다. 해당 통계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일자리의 절반 이상은 비정규직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또 지방 국립대를 포함하더라도 “평범하게 괜찮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의 비율은 15% 남짓에 불과하다. 치솟는 집값으로 인해 평범한 청년세대가 수도권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특수주의와 차별

이렇듯 희소해진 정상성 탓에 ‘정상투쟁 사회’의 두 번째 양상이 나타난다. 바로 ‘사회 주류의 특수주의’와 ‘탈락자들에 대한 차별’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상성을 쟁취한 이들은 자신의 노력에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지위가 가지는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노오력’ 담론도 이 탓에 나왔다. 내 풍요로운 삶은 처절한 노력 덕분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노오력’이 부족한 탓에 그렇게 산다는 주장이다. 구조적 맥락이 거세된 주장이지만, 동시에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약자를 대상으로 한 지원을 ‘역차별’로 간주하며 반발하곤 한다. 반면 이러한 ‘정상성의 고리’에 들지 못한 시민들은 자신의 삶을 ‘정상적이지 못한’, ‘실패한’ 삶으로 인식하며 공론장에 나오기를 꺼린다. 결국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못하고, “비정규직인 게 억울하면 시험 쳐서 들어오라”며 조롱한다. “여성은 여성적 직업에, 남성은 남성적 직업에 복무해야 하며,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규정한다.


-문명은 뭐하러 존재하나.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치열한 경쟁은 자연의 법칙이며, 약자가 도태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그럴 거면 뭐하러 문명을 만들었냐’고. 살아남기 위해 가족과 개인 단위로 흩어져 각자도생해야 한다면, 경쟁에서 밀려났으면 맨손으로 고압전선도 깔고, 발암물질도 마시면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뭐하러 문명을 만들었는가.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고, 매년 수능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이 스스로의 삶을 비관해 인생을 포기해야 한다면, 국어사전이 ‘문명’이라 정의하는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은 너무나도 볼품없는 게 아닌가.


이렇듯 ‘정상투쟁 사회’에서는 모두가 불행하다. 엘리트들은 가까스로 사수한 정상성을 수호하느라 불행하고, 정상성을 빼앗긴 이들은 자기 멸시와 차별 속에서 불행하다. 이러한 사회를 방치한다면 그리 넓지 않은 ‘평범함의 공간’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밥과 잠을 줄여가며 경쟁할 것이며, 그동안 노력한 게 억울한 엘리트들의 투정에 분노한 민심은 잔인한 포퓰리즘을 소환할지도 모른다.


-‘별일 없이 사는’, ‘뭐 별다른 걱정 없는’ 세상

하지만 사회의 모습은 언제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할 미래 사회의 성격은 우리가 규정한다.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향상은 무궁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제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열린다. 실업과 불평등이 증가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사회 시스템이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이 기다릴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사회는, 옆 반 친구를 시기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꼭 사회가 정해준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더라도, 그의 삶을 존재 자체로서 존중해주는 세상 말이다.


달라도 괜찮은 세상, 친구와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야만적 경쟁을 방치하는 대신, 지치고 힘들 때 시스템으로 지켜주는 세상.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랫말처럼,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노력해도 ‘별일 없이 사는’ 세상. 미래의 모습은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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